대회 전날 저녁 식사를 마치고 준비물을 챙겨 가방에 넣는다. 배번호표를 클럽 복에 달고 기록 칩도 마라톤화에 부착한다. 설렘 때문일까. 일찍 잠자리에 누워보지만 쉽사리 잠이 오지 않는다. 이리저리 뒤척이다가 잠이 든다.
새벽 3시20분 알람소리에 깨어 가방을 들고 버스 탑승 장소로 향한다. 내가 속한 대전 주주클럽은 100명이 넘는 선수와 자원봉사자가 이번 춘천마라톤 대회에 참가한다. 3대의 전세버스에 분승하여 한밭수목원을 출발한다. 대전요금소로 진입하여 전조등으로 어둠을 가르며 중부고속도로를 힘차게 달린다. 모두들 토막잠에 빠져들고 차내는 고요한 적막이 흐른다.
아침식사를 위해 문막휴게소에 정차한다. 황태해장국으로 아침 식사를 마치고 용변을 해결하기 위해 화장실로 들어서자 넘치는 인파로 북새통이다.
7시 40분 대회장인 공치천에 도착한다. 낯설지가 않다. 일찍 도착한 사람들이 분주하게 달릴 채비를 서두른다.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주주회원들과 준비운동을 한다. 부상 예방을 위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충분한 준비운동(웜업)과 마무리 운동(쿨링다운)이다.
아마추어 마라토너들에게도 춘천 국제마라톤은 '가을의 전설'로 통한다. 가을 단풍이 절정을 이룬 삼악산을 바라보며 의암호를 끼고 달리는 코스는 국내 최고로 정평이 났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춘천마라톤대회는 어쩌면 아마추어마라토너가 꼭 뛰어 보아야 하는 대회다.
춘천마라톤대회는 골드라벨대회다. 엘리트선수들의 수준, 상금 규모, 중계방송과 참가 인원수 등 대회 진행 수준 등을 종합하여 국제육상연맹이 선정한다. 골드라벨 대회는 전 세계에서 20개 정도, 우리나라에서는 3월에 열린 서울국제마라톤대회와 함께 단 2개뿐이라고 한다.
기대 반, 두려움 반, 출발선에 선다. 두 번째여서 긴장감이 덜 할 줄 알았는데 똑같다. 가을의 전설을 쓰기 위한 건각들의 역동적인 모습이 더욱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조직위가 배정한 그룹의 출발 순서보다 먼저 뛰면 실격이다. 참가자가 출발점의 전자매트를 밟고 지나가는 순간부터 기록이 측정되므로 여유를 갖고 몸을 풀면서 앞 그룹이 빠져나갈 때까지 기다린다.
배동성 아나운서의 출발 구령과 함께 힘찬 출발을 했다. 진정한 내 자신과의 싸움이 시작된다. 퍼지는 것도 욕심에서 나온다. 조금만 오버 페이스를 해도 몸은 용납 하지 않는다. 초반 오버페이스를 하지 않기 위해 조심스럽게 달린다. 다행히 많은 사람들로 속도를 낼 수 가 없어 초반 오버페이스는 하지 않았다.
손이 시릴 정도로 추운 날씨지만, 분위기만큼은 굉장히 활기차다. 가을의 정취가 흠뻑 느껴지는 만산홍엽의 가을 길을 달리니 한결 마음이 즐겁다. 추위를 피하기 위해 형형색색의 비닐로 몸을 감싸고 달리는 모습이 이채롭다.
마라톤을 오로지 달리는 데만 목적을 둔다면 마라톤의 진정한 의미를 간과하는 것이라 믿는다. 달리는 과정에서 내 안에 나를 만나고, 내 삶의 의미를 생각하고 살아온 삶의 반성과 앞으로 살아야 될 삶의 계획을 생각한다.
5km 급수대에서 물 한 컵을 마신다. 마라톤에서 수분섭취는 필수다. 급수대마다 조금씩 꾸준히 마셔야 후반에 수분부족으로 인한 탈수현상과 급격한 체력저하를 예방할 수 있다.
인간의 한계와 인내를 시험하는 마라톤은 자원봉사학생들에게 좋은 학습의 장이 다. 급수대에서 자원 봉사하는 학생들이 너무나 고맙다. “물드세요” “힘내세요” “완주하세요” 연신 외치는 소리에 힘이 난다. 수많은 자원봉사자들의 수고로 편안하게 마라톤을 할 수 있음이 감사하다. 2만 명이 지나가는 길에 오늘의 봉사는 학생들에게 행복을 안겨주는 추억이 될 것이다.
7km 지점에서 만나는 의암댐, 호반과 어우러진 울긋불긋한 가을 수채화를 한 눈에 담을 수 있다. 터널을 지나면서 선수들의 함성소리가 메아리가 되어 돌아온다. 의암댐을 돌면 2시 방향으로 가을 옷을 갈아입은 삼악산이 멋진 자태를 뽐낸다. 날씨가 흐려 달리기에는 좋지만 풍광은 예년만 못하다. 춘천댐을 향해 달린다. 가을 정취를 느끼는 사이 코스는 중반을 넘어선다.
마라톤은 끊임없이 42.195km를 달려야하기에 강인한 체력과 정신력 그리고 인내가 요구된다. 아직도 먼 길 한발 한걸음 어차피 가야만 한다.
춘마가 나에게 감동인 것은, 의암호의 단풍과 물안개 그리고 터널을 통과할 때 함성이 이어지는 멋진 기억도 있지만, 투병중인 친구나 동료의 완쾌를 비는 소망을 적은 메모를 등에 달고, 자식의 합격을 비는 부모의 간절한 바램과, 제자들의 수능대박을 기원하는 선생님의 마음 등, 이런저런 사연들을 달고서 역주하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가슴 뭉클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정오가 지나자 햇빛이 내려쬐기 시작한다. 춘천댐 서상대교까지 계속되는 오르막은 부담스럽다. 첫 번째 고비다. 은근한 오르막에 걷는 주자들이 많아지는 곳이다. 언덕을 넘어 또 언덕 그래도 혼자가 아니다. 수많은 사람이 함께 달리고 있어 위로가 된다.
춘천댐 코스는 생각보다 그리 힘들지 않았다. 오히려 32km 근처 터널 오르는 언덕이 더 힘들다.
마라톤은 42.195km 를 고독하게 달리는 경기이기 때문에 자신과 싸우는 시간이 길고 스스로를 다시 볼 수 있는 최적의 운동이다. 그것은 누가 시켜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스스로 선택하여 고통을 감내하는 것이며 자신이 만든 과제이므로 보다 가치가 높다.
마라톤 참가자들이 달리기 도중 가족이나 친지, 친구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공개적으로 할 수 있는 '마(魔)의 30㎞ 자유발언대'가 올해 춘천마라톤에 처음으로 등장했다. 참가자들이 체력적으로 가장 부담을 느끼는 34km 지점에 설치됐다. 3시간 넘게 달려온 참가자들이 수십 명씩 줄을 서서 기다렸다가 자유발언대에 올라 그간 마음에 담아뒀던 말을 쏟아낸다.
가족에게 사랑과 응원의 메시지를 전하는 참가자의 음성이 귓가에 전해진다. 가슴이 뭉클하다. 이날 자유발언대에 오른 참가자들의 영상은 인터넷 동영상 공유 사이트 유스트림(Ustream)과 LTE 통신망을 이용한 HD TV 생중계를 통해 전국에 실시간으로 전파됐다고 한다.
도로변에 102보충대 장병들이 도열하여 힘찬 응원을 보낸다. 작년에는 이 지점을 지나면서 무릎에 통증을 느낀 지점인데 다행히 올해는 별다른 이상이 없다.
37.5km 지점 스펀지 공급대를 지나자 수많은 동호회의 회원들이 플랜카드를 걸고 소속 선수들을 응원한다. 주주클럽 회원들의 응원을 받으며 40km를 향해 달린다.
소양2교를 건너 오른쪽으로 돌자 은근한 연주곡이 울려 퍼진다. 40km 지점 전자매트를 지나면서 걷는 사람들도 많아진다. 마라톤에서 40km 이후엔 신의 힘으로 달린다고 한다. 정말 이땐 고통마저도 감미로운 무아지경이다. 골인지점 1km 전방부터는 가족, 동호회원 등 많은 사람들이 응원을 한다. 이땐 자기도 모르게 힘이 저절로 난다. 마라톤은 중독성이 강하다. 달릴 수 있으면 행복한 것이다. 지금 달리고 있으면 더 더욱 행복한 것이다. 행복한 피로감이 온몸을 포근히 감싼다.
곳곳에서 사진 촬영의 셔터소리가 들린다. 몸은 힘들지만 손을 들어 멋진 포즈를 취하며 미소를 보낸다.
드디어 골인. 3시간 53분40초. 105리의 머나먼 길을 달려온 내 다리가 자랑스럽다. 작년 첫 출전에 실패했던 서브-4 목표 기록을 무난히 달성했다.
2만5000여명이 하늘과 단풍, 호수가 어우러진 가을을 달렸다. 서로 다른 '가을의 전설'을 꿈꾸며 달린 42.195km. 자신의 한계에 도전한 참가자 25000명 모든 이가 승리자다.
주주클럽의 마지막 주자가 들어오고 우리 일행은 춘천 닭갈비집으로 이동하여 춘천의 명물 닭갈비를 안주삼아 시원한 맥주로 건배를 하고 정담을 나누며 서로 완주를 축하하고 ‘가을의 전설’을 만끽했다. 춘마는 내년을 기약하며 그렇게 아련한 추억으로 물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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