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6월 9일 : 대전-장흥-제주도, 한라산(어리목-윗세오름-남벽-북벽-윗세오름-영실)
여행을 모르면 인생을 절반만 사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여행은 가는 사람이 그곳에 또 간다'는 말도 있다. 돌아와 내가 다시 서야 하는 자리에서의 일상을 건강하게 꾸려가기 위해, 더 많이 사랑하고, 더 깊이 이해하고, 더 넓게 보기 위해 떠나는 것이 여행이다.
산으로팀을 따라 작년에 세계 제7대자연경관지로 선정된 제주도를 찾았다. 한라산 정상에서 일출을 보는 매력적인 일정이다. 팀원들도 산행을 즐기는 사람들이어서 더욱 편안하다.
대전에서 버스를 타고 약 3시간 40분을 달려 장흥노력항에 도착한다.
산악회에서 준비한 밥과 국으로 간단히 아침 요기를 하고 노력항여객선터미널로 들어선다. 제주도 여행을 즐기려는 이들로 터미널 대합실은 크게 붐빈다. 장흥의 명물 '오렌지호'에 오른다. 비행기는 빠른 교통수단으로 편리하지만 배는 단순한 교통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여행이다. 선내에는 던킨도너츠가 영업중이고 2층은 일반석 3층은 우등석이다.
여행은 늘 나를 다시 깨어나게 만든다. 내가 항상 보고 느끼는 나만의 작은 공간에서 탈출하여 좀 더 큰 날갯짓으로 좀 더 큰 세상을 바라보게 하는 것이 바로 여행인 것 같다.
출발하고 잠시후 갑판에서 바다풍광을 감상할 수 있도록 15분 동안 시간을 주자 갑판위는 금새 인파로 북새통이다.
남해바다의 망망대해를 약 2시간 20여분쯤 달리니 제주도 성산포항에 닿는다. 성산포항에 첫발을 내딛자 '바람도 풍경'이 되는 제주도의 바람이 코끝을 간질인다. 여객선 터미널을 빠져나가 주차장에 준비된 버스에 오른다.
먼저 성읍민속마을로 향한다. 성읍민속마을은 360여 채의 초가집과 낡고 오래된 풍경이 발길과 눈길을 붙잡는 특별한 공간이다. 600여 년의 세월이 쌓인 초가지붕 사이로 오래된 시간이 새어나오는 곳. 느리고 오래된 것도 행복의 한 가지라 여기며 살아가는 제주 성읍민속은 하루 평균 1만 5천여 명의 관광객이 다녀가는 명소가 됐지만, 불과 얼마 전까지도 이곳은 우리네 평범한 고향이었고 주민들에게는 여전히 삶터이다.
△정랑 : 3개가 걸쳐 있으면 먼 곳으로 출타중이니 다음에 오라, 두 개가 걸쳐 있으면 밭에 일하러 간다, 한 개가 걸쳐 있으며 가까운 곳에 잠시 다니러 갔다, 한 개도 안 걸쳐있으면 지금 사람 있으니 들어오라는 의미.
△똥돼지가 가장 싫어하는 사람은 변비 걸린 사람인데 줄듯 줄듯하면서 주지 않기 때문이라나. 그리고 볼일을 볼 때 남자는 나무 몽둥이를 필히 준비해야 하지만 물건이 작은 사람은 필요 없다고 해서 모두들 박장대소한다.
해설사로 활동하는 사람들은 모두 주민이라고 한다. 우리 팀을 안내한 40대 후반의 젊은 어멍 현금옥씨의 걸죽한 입담에 모두들 함박웃음을 짓으며 설명에 집중한다.
△나뭇잎에 떨어진 빗물을 볏짚을 이용해 1차 정수를 거쳐 항아리에 담는다. 항아리속의 물에 벌레가 생기면 개구를 넣어줬다고...
돼지고기 두루치기로 점심식사를 하고 어리목으로 향한다. 어리(御里)목은 한라산의 어승생오름 남쪽에 있는 한라산의 등산 길목이다. '어리'는 18세기 중반의 쓰여진『증보탐라지』에 '빙담(氷潭: 어름소)'으로 표기 된 것을 고려할 때 '어름'의 변음으로 보인다. '목' 은 통로 가운데 다른 곳으로는 빠져나갈 수 없는 중요하고 좁은 곳을 뜻하는 고유어이다.
숲 터널에 계단으로 잘 정돈된 등산로를 따라 30분 정도 오르면 해발 1200m 지점(어리목에서 1.6km)에 커다란 물참나무가 눈에 들어온다. 송덕수다.
“조선 정조 18년(1794년) 흉년이 들어 굶어죽는 이들이 많이 생겨나자 계집종이 초근목피라도 구해 주인집 식구를 살려보려고 이 나무 아래까지 올랐다 체력이 다해 쓰러졌는데, 우박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온몸이 도토리에 덮여 있어 그것을 주워 주인집 식구를 살렸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이후 흉년 때마다 이 나무에서 나는 도토리로 연명할 수 있게 되자 나무의 덕을 감사하기 위해 제사를 올렸다 한다.”
10분 정도 더 진행하여 해발 1300m 지점을 지나자 숲 터널이 끝나고 초원이 펼쳐진다. 훼손된 등산로에는 나무판을 깔아놓았다. 등산로 오른쪽에 사제비오름(해발 1423m)이 보인다. 제비가 죽어 있는 형상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맑고 시원한 물이 콸콸 흘러나오던 사제비샘은 가믐으로 말라있고 바가지만 덩그러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오른쪽으로 보이는 챗망오름의 분화구는 양쪽으로 노꼬메와 바리메의 호위를 받아 더욱 의젓해 보인다. 오름의 모양이 채의 망처럼 생겼다하여 챗망오름이라 하고 제주의 전통농기구인 골체를 닮아 골체오름이라 한다.
만세동산 전망대에서 잠시 쉬어간다. 만세동산 전망대에 서면 민오름과 장구목, 윗세오름으로 이어지는 탁 트인 전망이 일품이다.
윗세오름대피소까지는 완경사의 초원지대로 백록담 화구벽과 북서릉을 바라보며 오른다. 윗세오름은 한라산 정상인 북악 서쪽으로 나란히 솟아 있는 세 개의 오름을 통틀어 일컫는 이름으로 붉은오름(큰오름), 누운오름(샛오름), 새끼오름(족은오름)을 말한다. 오름약수 역시 말라있다. 푸른 하늘과 새소리 벗 삼아 천천히 걷는다.
노루샘에서 식수를 보충하고 금줄을 넘어 남벽 분기점을 향해 숲속으로 숨어든다.
대평원 너머에 한라산 정상 화구벽이 위협적인 자태를 뽐내고 있다. 사람들은 한라산을 두고 신의 정원이라 부른다. 계절마다 색깔이 다르고 생태가 다르고, 계곡마다 전설이 서려 있는, 그래서 사람들은 한라산을 동경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숲속에 몸을 감추고 휴식을 취하며 서산에 해가 넘어가기를 기다린다. 아득히 솟아오른 백록담 화구벽을 포근하게 안은 너른 벌판. 하루 종일 바람이 휘몰아치는 곳. 그리고 봄이 되면 온 들판이 산철쭉과 털진달래의 분홍빛 물감으로 물드는 곳, 선작지왓.
대개의 사람들이 한라산(1950m)하면 백록담을 떠올리지만, 평온의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선작지왓을 아는 이는 정말 드물다. 그 이름도 생경하거니와 변변한 안내판 하나 없으니 어찌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선작지왓은 제주도 사투리로 돌(작지)들이 드문드문 널린 들판(왓)이란 뜻이다. 이 들판은 해발 1700미터의 고지에 수백만 평의 넓이로, 그야말로 아득하게 지평선 끝까지 펼쳐져 있다.
소주 1병을 비우고 남벽분기점을 향해 진행한다. 이제부터 이 넓은 한라산은 우리 일행들이 모두 차지하는 호사를 누린다. 한라산 정상의 백록담이 손에 잡힐 듯 하고 산 아래로는 서귀포 앞바다에 떠있는 섬들과 태평양의 망망대해가 펼쳐져 환상적인 풍경을 자아낸다.
한라산의 철쭉은 단연 선작지왓 일대를 첫손으로 꼽는다. 선작지왓의 너른 초원에는 봄이면 일찌감치 털진달래가 피어 한바탕 꽃잔치를 벌인다. 털진달래가 5월 중순쯤 다 떨어지고 난 뒤에는 잠시 쉬었다가 6월 초쯤 다시 진분홍색의 산철쭉이 드넓은 들판을 수놓아 장관을 연출한다. 이 무렵의 선작지왓 일대는 가히 '산상화원'이란 이름값을 한다. 거센 바람 탓인지 이곳 철쭉은 유난히 키가 작지만 꽃만큼은 화려하다. '한라산의 봄'을 주제로 한 사진의 대부분이 이곳에서 철쭉꽃 너머로 백록담 화구벽이 올려다 보이는 장면을 찍은 것일 만큼, 한라산에서 대표적인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올해는 꽝이다. 작년 태풍 때문이란다.
철쭉은 어디서나 만날 수 있지만, 깊은 산에서 만나는 것이 가장 아름답다. 산에서 만나는 철쭉은 심어 기른 것만큼 화려하진 않지만, 본격적인 여름으로 접어드는 길목에 연두색의 신록과 어우러져 능선마다 피어난 철쭉의 행렬을 따라 산길을 걷는 맛이 각별하기 때문이다.
광활한 평원이 평원이 펼쳐진다. 기대했던 철쭉의 향연은 볼 수 없지만 이국적인 황홀한 풍광에 모두들 감탄사를 터트리며 행복해한다.
노을이 내려앉은 산속은 고즈넉하다.
방아오름샘을 지나자 운해가 장관이다.
드디어 남벽분기점에 도착한다. 통제소앞 나무 데크에 자리를 잡고 일부는 저녁식사 준비를 일부는 침낭을 펴 비박 잠자리를 준비한다. 오리훈제와 곰취를 비롯하여 발레타인과 소주가 비박 산행의 즐거움을 더한다.
침낭에 몸을 눕히고 하늘을 바라본다. 밤하늘에 별들이 쏟아질 듯 점점 많아지고 북두칠성이 머리 위에서 빛난다. 외국 산행을 하면서는 몇 번 비박 경험이 있지만 국내 비박 산행은 처음이다. 맑은날씨와 좋은 동행들 그리고 평생 경험하기 어려운 한라산 일출을 볼 수 있다는 설렘... 어느 것 하나도 부족함이 없이 완벽하다. 행복함이 밀려온다.
보고 싶었던 철쭉은 작년 태풍의 영향으로 모두 말라 올해는 거의 꽃을 피우지 못했다. 예년 사진으로나마 아름다운 모습을 감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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