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일 : 2008년 12월 14일(일)
산행코스 : 엄사중학교-맨재-향적산-윗산명재-아랫산명재-함지봉-깃대봉-황산성-연산 관동리
원래는 용화사에서 시작하여 용천령을 거쳐 향적산으로 진행할 계획이었으나 국립공원관리공단 측에서 출입통제구간이므로 산행을 자제해 달라는 요청이 있어 부득이 계획을 변경하여 엄사리에서 맨재로 붙기로 한다.
7시 35분 엄사중학교에서 산행을 시작한다. 이른 시간이어서 미쳐 모습을 감추지 못한 보름달이 나그네들을 맞는다. 기온은 영하 5도 아침 공기가 차다.
7시40분 금남 정맥길로 들어서 가파른 산비탈을 치고 오른다. 3분 정도 지나서 뒤돌아보니 찬란한 아침 해가 동아아파트 뒤편 산에서 불쑥 고개를 내민다.
10분 정도 오르자 국사봉 4.16km 이정표가 보인다. 예전에는 볼품없는 이정표였는데 깨끗하게 잘 단장된 이정표가 설치되어 있다. 곳곳에 이정표가 잘되어 있어 길을 잃을 염려는 없다. 산을 찾는 이들을 위한 지자체의 배려가 고맙다.
엄사중학교에서 직접 올라오는 길과 만나는 사거리를 지나면 완만한 오르막길이다. 바둑이님이 걸음을 멈추고 따끈한 차 한 잔을 권한다. 맛있는 대추차 한 잔의 향과 온기가 온몸에 퍼진다.
만안사 갈림길에 서자 향적산(국사봉)과 남부능선이 보이고 오른쪽 산 아래 계룡대 안에 옥타곤이 눈길을 끈다. 무상사 갈림길을 지나자 아침 햇살을 받은 계룡산 상봉이 그 위용을 드러낸다.
군부대 갈림길을 지나면 원통형 나무를 가로로 박아 만든 계단이 설치되어 있다. 가파른 오르막길을 10여분 오르자 맨재에 닿는다.
사방 막힘 없는 시원한 조망이 펼쳐진다. 오른쪽으로 상봉을 비롯하여 문필봉과 연천봉 그리고 그 아래 등운암까지 시야에 들어온다. 바로 아래 논산시 상월면 들판이 보이고 금강대학교가 손에 잡힐 듯하다. 잠시 숨을 고르고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향적산으로 향한다.
계룡산 공개바위가 잠시 걸음을 멈춘다.
맨재에서 10분 정도 진행하면 향적산 아래 헬기장에 도착한다. 먼저 도착한 일행들과 간식을 나누어 먹으며 잠시 휴식을 취한다. 집에서 보온병에 커피를 타오면서 조미료를 백설탕인줄 알고 넣어 온 갓바위님의 커피는 많은 사람에게 웃음을 선사한다. 윤선생님(새벽안개)의 커피는 언제나 맛과 향이 끝내 준다.
오르막길을 10분 정도 올라서면 향적산(국사봉)에 닿는다.
향적산(香積山) 국사봉은 이성계가 신도안에 도읍을 정하고자 할 때 친히 올라와 신하들과 국사를 논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국사봉은 계룡산을 조망할 수 있는 최고의 조망터이며, 종교연구가들에게는 제2의 신도안이자 한국 최고의 무속촌이었다.
전에 없는 정상 표지석이 보이고 조미향 할머니의 전설이 깃든 천지창운비와 오행비는 비석이 세워진 기단부가 깨어지는 등 어지러웠던 주변을 말끔하게 정비하고 비를 보호하기 위한 울타리가 설치되어 있다.
이 비석은 평양에서 이곳으로 이주한 조(趙)씨 성을 가진 할머니가 이곳에서 매일 기도하던 중 묘향산과 구월산에 산재하던 단군의 넋이 이곳으로 옮겨왔다고 신격화하면서 기도터로 사용하기 시작하였고, 그는 8.15광복과 6.25전쟁을 정확히 예언하였다고 한다. 1948년 조씨 할머니가 죽자 며느리 손씨부인이 시어머니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이 비석을 세웠는데 그 비(碑)안에는 "우리나라가 천년이상 동방예의지국이 될 수 있도록 하는 단군 성조의 깊은 뜻을 담았다"고 한다. 동쪽에는『天鷄黃地』 서쪽에는『佛』 남쪽에는『南斗六星』 북쪽에는『北斗七星』이라는 글이 음각 되어 있다. (계룡시 홈페이지에서..)
북두칠성은 죽음을 관장하고 남두육성은 삶을 관장한다고 한다. 인간이 어머니의 뱃속에 깃들면 남두육성은 탄생일을 기록하고, 북두칠성은 사망일을 기록한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그러나 인간의 생명은 창조주 하나님이 주인이고 그 누구도 간섭할 수 없는 것이다.
끝없이 펼쳐진 산그리매가 은은하게 퍼진 고운 아침햇살과 어우러져 멋진 풍광을 그려낸다. 대전 충남북에서 가장 높다는 서대산과 충남과 전북에서 도립공원으로 지정된 대둔산, 운장산을 비롯하여 멀리 속리산과 구름위에 떠 있는 덕유산까지 거침없는 조망이 모두의 감탄을 자아낸다.
황산성을 향해 걸음을 옮긴다. 왼쪽 산 아래 무상사는 2000년 3월에 창건된 절로, 이 절은 주지인 대진스님을 비롯해 외국인 스님 10여명 기거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오른쪽에 노성산과 상월면 일원이 내려다보인다. 향적산에서 6-7분 정도 진행하면 농바위(일명 상여바위)에 닿는다. 도곡사 갈림길과 극락사 갈림길을 차례로 지난다. 논산시에서 정비를 하여 비교적 등로가 잘 되어 있다. 제법 많은 사람들이 이 길을 찾는가보다.
10시30분 햇살 따뜻한 양지 바른 묘지 앞에 도착하자 새벽에 집을 나서면서 아침을 거르거나 일찍 먹은 탓에 모두들 배가고픈지 점심식사를 하자며 자리를 잡는다. 삼삼오오 모여 앉아 도시락을 펴고 복분자주와 하수오로 담근 술이 한잔씩 돌아간다. 겨울산행에서는 따끈한 라면이 단연 인기다. 커피와 과일 후식까지 달콤한 점심식사를 마치고 길을 재촉한다.
겨울에는 찾는 사람들이 많지 않아서 땅에 떨어진 낙엽이 그대로 남아 가을정취를 느끼게 한다. 배부른 일행의 발걸음이 가볍다. 435.6봉쯤 되는 삼각점을 지나자 왼쪽으로 오골계 농장이 보인다.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보니 지나온 향적산이 까마득하다.
표정리로 내려가는 갈림길을 지나 함지봉에 도착한다. 논산 탑정저수지가 바로 눈앞에 펼쳐진다. 가까이보이는 마을은 흰 돌이 많아서 흰돌마을 또는 백석이라 하는데 이인재씨 고향이라고 한다.
깃대봉을 내려서 표정리로 갈라지는 갈림길을 지나자 예쁜 바위강아지가 귀를 내리고 따뜻한 햇살에 졸고 있다.
길은 오르내림 없고 산책로처럼 부드럽다. 황산성에 도착한다. 연산평야와 논산평야가 내려다보이는 해발 264m의 산봉우리를 빙 둘러 돌로 쌓은 황산성은 잡풀로 우거져 있지만 곳곳에 잡초에 묻힌 허물어진 성곽의 흔적이 보인다. 그 옛날 백제의 5천 대군이 이용하던 성내에 있는 우물은 관리가 거의 되지 않아 엉망이다.
황산성주차장으로 내려서 황산성 유래가 적힌 안내판을 구경하고 야산을 하나 넘어 계백 장군이 화랑 관창의 목을 벤 곳이라 하여 관창골이라 하다가 지금은 관동리로 지명이 변경되었다는 관동리 마을회관 앞으로 내려선다.
연산천에 갈대가 장관이다. 바둑이님이 준비한 오뎅 국을 안주삼아 하산주를 하고 이 고장 연산에서 유명한 원조 순대집을 찾아간다.
연산면은 신라 경덕왕 때에 황산군이었다가 고려 초에 연산군으로 바꾸었고,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연산면으로 개편되어 논산군에 편입되었다. 연산의 천호산은 그 산세가 연이어져 있어 연이은 산이란 뜻에서 연산이란 지명이 생겨난 것 같다.
연산지역 황산벌은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장군 계백이 결사대 5천을 거느리고 출전하여 신라 장군 김유신의 5만 군사와 최후 결전을 벌린 곳이고, 후삼국시대에는 고려 태조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한 곳이기도 하다.
이와 같이 연산지역은 백제의 편에서 보면 망국한으로 얼룩진 곳이요 신라의 편에서 보면 지축을 울렸던 곳이기도 하다. 200여년이 지난 후 또다시 후백제의 망국한의 혈루가 이곳 연산에 쏟아져 삼국 재통일의 대단원의 막을 내린 그야말로 국운이 걸려있던 유서 깊은 곳이기도 하다.
대전으로 돌아오며 개태사에 들린다.
개태사(開泰寺) 는 고려 태조 19년(936)에 연산(連山, 지금의 논산시 연산면) 천호산(天護山, 원래이름은 황산)에 짓기 시작하여 23년 12월에 완공한 화엄종 사원이다.
그러나 개태사는 조선 초기부터 퇴락하기 시작하였으며, 1428년(세종 10) 이 절이 연산현(連山縣) 내에 있는 것이 옳지 못하므로 풍년을 기다린다면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한다는 진언이 있어 세종이 현재의 위치로 옮기게 하였다. 1432년 이 절의 승려가 큰 수정석(水晶石) 2과(顆)를 세종에게 헌상하였고, 세종의 불교진흥책으로 중흥의 기틀을 보였으나 그 뒤 폐허가 되었다. 절터에 삼존석불입상과 석탑·부도·공양보살상이 흩어져 있었으며, 1934년에 김광영(金光營)이 중건하여 도광사(道光寺)라 하였다가, 그 뒤 다시 개태사라 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기록에 의하면 개태사는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한 후 후백제를 평정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약 4년간에 걸쳐 축조했다. 그래서 태조의 영정을 모시는 진전(眞殿)이 있었으며, 국가에 변고가 있을 때에는 이곳에서 신탁(神託)을 받는 등 왕실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면서 유지되어 왔다.
그러나 고려 말기에 이르러 사운은 쇠퇴하기 시작한 것으로 전한다. 즉 고려 말기 잦은 왜구의 침입에 의해 잦은 방화와 약탈을 당하게 되어 조선시대에는 계속 폐사된 채 방치되어 왔는데 1934년에 이르러 오늘날의 사찰이 재건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펌]
개태사 일주문에는 ‘대천호산 삼천일지 개태사(大天護山 三天一地 開泰寺)’라고 적혀 있다. 바로 삼천대천 세계를 이 땅위에 실현하고자 한 고려 태조왕건의 마음이 담긴 현판이라 한다.
절마당으로 들어서면 먼저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74호인 오층석탑과 제275호인 석조(石槽)가 눈에 들어온다.
석탑 뒤편의 법당의 현판이 여느 사찰에서 볼 수 있는 '전(殿)'이 아닌 미래불인 미륵의 공간이라는 뜻으로 '용화궁(龍華宮)'이라 이름 붙인 것이 이채롭다.
용화대보궁에 들어서면 웅장한 세 개의 석조 부처가 자리하고 있는데 보물 제219호인 석불입상이다. 중앙의 본존불은 아미타부처로 백성들이 내세에는 아미타부처가 있는 극락세계로 가라는 태조 왕건의 마음을 담은 부처이며, 좌우에 보살상은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라고 한다. 왕건이 이곳에 개태사를 세우면서 조성한 것으로 절이 피폐해지면서 땅속에 묻혀 있다가 후에 다시 세워졌다.
△충청남도 민속자료 제1호인 철확(鐵泳)
이곳은 백제의 계백장군이 오천의 결사대와 함께 최후의 결전을 벌린 곳으로 이 싸움에서 백제가 패함으로써 결국 백제는 망하고 만다.
그리고 세월이 유수와 같이 흘러 신라가 망국의 길을 걷고 이 지역은 후백제의 견훤이 다스리게 되었다가 다시 고려의 왕건에게 무릎을 꿇은 곳이다. 후백제의 제 2대왕 신검의 마지막 남은 군대와 왕건의 군대는 여기서 명운을 건 일전을 벌리게 되고 후백제는 이곳에서 결국 항복을 하고 만다.
견훤이 후백제 건국의 기치를 내세우고 건국한지 45년 만에 그 꿈을 접으므로 써 왕건은 명실상부한 한반도의 유일한 지배자로 매김을 하게 된다.
지금의 논산인 황산벌 싸움에서 이긴 왕건은 승전을 기념하기 위해 항복을 받은 자리에 절을 세우고 개태사(開泰寺)라고 했다. 그리고 본디 황산이라는 산 이름도「하늘이 도와서 통일을 이뤘다」고 하여 천호산으로 개명했다. 태조 왕건이 죽은 후 태조의 영정을 모신 전각을 세우고, 태조가 입던 옷과 옥대(玉帶)를 보관했다고 한다.
개태사는 전성기엔 천여 명의 승려가 상주하여 화엄법회를 갖는 등 승려 양성도량 역할을 담당하였고, 한때에는 8만9암자(八萬九庵子)를 소속시켰으며, 대각국사(大覺國師)의 장경불사(藏經佛事 : 校正)도 이곳에서 이루어 졌다 한다.
국가의 변고(變故)가 있을 때마다 중신(重臣)들이 호국기도(護國祈禱)를 드리던 고려시대 최대의 호국수호사찰(護國守護寺刹)이다.
그 후 우왕(遇王) 2년부터 14년까지 3차례에 걸친 왜구(倭寇)의 침입으로 방화 약탈되고, 원수(元帥) 박인계(朴仁桂)가 이곳 전투에서 패함으로써 개태사는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이와 같이 빛을 잃은 개태사는 이후 5백 여 년 동안 폐사된 채 내려오다가 1934년 재건되었다. [펌]
'계룡산' 카테고리의 다른 글
26. 겨울산책-심우정사 (0) | 2009.01.14 |
---|---|
25. 자연성릉길 (0) | 2008.12.25 |
23. 장군봉-삼불봉-갑사 (0) | 2008.08.28 |
22. 아내와 둘이...도덕봉-금수봉 (0) | 2008.08.28 |
21. 봄소풍( 2008년-1학년) (0) | 2008.08.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