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일시 : 2007년 4월 15일(일)
인생은 돈 있는 자만 부자가 아니라 즐기는 자도 부자다.
물론 돈 많은 것도 부자이지만 여가시간이 많은 사람도 시간부자인 것이다.
지식은 도시에서 배울 수 있지만 그걸 담는 그릇은 자연에서 배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연이라 부른다. 스스로 자(自) 그럴 연(然), 스스로 그렇게 됐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천연계(天然界)라 부른다. 창조주 하나님을 믿기 때문이다.
천연계에서 우리는 평상시 가까이 느끼지 못하는 하늘의 사물에 다가선다.
천연계가 주는 가르침은 단순하고 순결하다.
천연계의 아름다움은 죄와 세상이 주는 매력에서
마음이 떠나게 하며 순결과 화평을 추구한다.
천연계를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때 아름다운 품성이 형성된다.
정신력은 강해지고 품성은 계발되어 고상하게 된다.
-엘렌 G.화잇-
4월 둔산SDA산행은 웰빙 산행을 테마로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전북 진안의 마이산을 택했다. 이번 산행에 참여한 인원은 10명. 스타렉스는 유성나들목으로 진입하여 대전-통영간고속도로로 갈아타고 장수나들목으로 빠져나간다. 19번 국도를 타고 가다 장계에서 26번 국도로 갈아타고 진안으로 향한다.
호남이 평안하려면 마이산 지역이 진정되고 편안해야 한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 ‘진안(鎭安)’이다. 금강과 섬진강의 발원지인 전북 진안은 평균해발이 290m로 호남의 지붕이라고 불리는 고원지대다.
풍수지리학자들은 진안이 산태극 · 수태극의 중심에 자리 잡아 우리나라에서 기가 가장 많이 흐르는 곳이라고 말한다.
다시 30번 국도로 들어서자 말귀처럼 쫑긋 솟은 두개의 암봉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왼쪽이 암마이봉(686m), 오른쪽이 숫마이봉(680m)이다. 마이산은 음과 양을 갖춘 부부봉으로 불리기도 한다.
마이산(馬耳山)은 두 암봉이 나란히 솟은 형상으로 말의 귀와 흡사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호남정맥과 금남정맥, 호남금남정맥이 마이산에서 시작된다.
동으로 달리는 천마는 이미 지쳤는가
갈 길은 먼데 그만 쓰러지고 말았구나
연인은 몸통만 가져가고 두 귀는 남겼는가
두 봉우리 이루고 하늘로 솟아있네
태조 이성계가 아직 고려의 장군으로 있었을 때 마이산을 지나다 이 시를 지었다. 나중에 태종이 이곳에 왔다가 부왕의 시를 보고 '마이산(馬耳山)'이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진안읍내 어느 방면에서나 눈에 띄는 마이산은 금강산처럼 철에 따라서 네 가지 이름으로 불린다. 봄에는 안개를 뚫고 나온 두 봉우리가 쌍돛배 같다하여 돛대봉, 여름에 수목이 울창해지면 용의 뿔처럼 보인다고 용각봉, 가을에는 단풍 든 모습이 말의 귀 같다 해서 마이봉, 겨울에는 눈이 쌓이지 않아 먹물을 찍은 붓끝처럼 보여 문필봉이다.
도립공원인 마이산을 두고 한 외국인이 "산 속에 저렇게 큰 콘크리트 구조물을 만든 기술도 놀랍지만 그 엄청난 물량의 시멘트를 어떻게 충당했을까"라는 웃지 못 할 질문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화전교를 건너 동천리로 들어서자 남부주차장까지 만개한 벚꽃이 화사한 자태를 자랑하며 눈을 즐겁게 한다.
주차료를 징수하는 매표소를 지나자 더욱 아름다운 풍광이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남부주차장으로 들어가다가 보면 오른쪽 깎아지른 절벽 아래 한옥식 사당이 하나 있다. 1946년에 건립한 이 사당에는 단군, 이성계, 세종대왕, 고종황제를 비롯하여 40현위, 34열사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이곳은 이 태조의 건국에 얽힌 이야기가 전해오며, 또 구한말 왜적이 침략했을 때 면암 최익현이 회문산에서 의병을 일으키자 이석용 의병장이 이곳에서 의병 300명을 모아 의병창의동맹단을 조직하고 바위에서 말을 잡아 그 피로 제사를 지냈던 곳이다.
◇마이산에 얽힌 전설
‘멀고 먼 옛날, 죄를 짓고 하늘나라에서 쫓겨난 산신부부가 자식 둘을 낳고 인간 세상에 살고 있었다. 오랫동안 속죄의 날을 보낸 끝에 마침내 하늘나라로 승천할 기회를 얻었다. 남편 산신은 승천하는 모습이 사람들 눈에 띌 경우 부정을 탈 우려가 있으니 한밤중에 승천하자고 했고, 아내 산신은 밤에 떠나기가 무서우니 새벽 일찍 떠나자고 했다.
그러나 다음날 새벽 정화수를 찾던 동네 아낙에게 발견되었고 아낙은 처음 보는 승천광경에 놀라 비명을 질렀다. 부정을 탄 이들 산신은 승천의 꿈을 접어야했고 화가 난 남편 남신은 두 자식을 빼앗고 그 자리에서 암수 바위산이 되고 말았다’. 는 전설 때문인지 숫마이봉은 두 아이를 안고 있는 모습이고 암마이봉은 등을 돌린 채 고개를 숙이고 앉은 모습이다.
산행은 마이산 남부주차장에서 시작하여 고금당(나옹암)을 거쳐 나봉암(비룡대)과 제2쉼터(봉두봉)에서 휴식을 하고 암마이봉 갈림길에서 탑사로 내려서 은수사까지 갔다가 다시 탑사를 거쳐 금당사를 지나 남부주차장으로 돌아오는 원점회귀코스를 택했다.
이른 아침시간이라 비교적 한산하다. 주차장에 주차하고 간단한 산행 준비를 마친 다음 매표소를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마이산 금당사’ 일주문을 지나면 오른쪽에 등산안내도가 서 있다.
매표소(입장료 2000원)에서 몇 걸음 옮기면 왼쪽으로 고금당으로 향하는 산행들머리가 나타난다. 약 20분이면 주능선 삼거리에 닿는다. 왼쪽 길은 고금당, 오른쪽 길은 비룡대로 이어진다. 이 삼거리에서 100m 정도 오르면 고금당 나옹암에 닿는다. 오른쪽으로 비룡대, 삿갓봉, 암마이봉이 아름답게 펼쳐진다. 아직 숫마이봉은 보이지 않는다.
고금당 나옹암은 자연 암굴로, 고려 말 고승 나옹 선사의 수도처라서 나옹암이라 한다. 원래 금당사가 터를 잡았던 곳이기 때문에 고금당(古金塘)이라는 이름과 함께 쓰고 있다.
나옹(1320~1376)은 20세에 출가해 경기도 양주 회암사에서 득도했고, 중국으로 건너가 인도승 지공화상으로부터 법을 받아 1358년 귀국해 고려 불교 중흥에 많은 공을 세웠다.
나옹은 1371년 공민왕의 왕사가 되었다. 보우, 무학 등이 나옹의 제자다. 토굴가 등 많은 시와 가사를 남기고 경기도 여주 신륵사에서 입적했다.
고금당은 온통 금색으로 칠을 해 이국적인 느낌이 들지만 고풍스런 멋은 없다. 산 아래 남부주차장 부근의 풍광이 아름답다.
고금당을 구경하고 다시 삼거리로 나와 팔각정이 세워진 비룡대로 향한다. 고금당 나옹암에서 25분이면 40m 길이 철계단이 나타난다. 철계단을 올라서면 나옹암(527m) 꼭대기에 세워진 2층 팔각정자인 비룡대에 닿는다. 비룡대에 서면 그동안 암마이봉에 가려 보이지 않던 숫마이봉이 비로소 그 모습을 살짝 드러내고 그 왼쪽으로 다섯 개의 작은 암봉으로 이뤄진 삿갓봉(관암봉)도 아름답게 펼쳐진다.
준비한 간식을 나누며 휴식을 취하고 비룡대를 내려서서 동쪽 암릉 길을 타고 25분 정도 진행하면 삿갓봉 갈림길이 있는 삼거리에 닿는다.
안부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면 봉두봉으로 오르는 완만한 오르막길이 이어진다. 오른쪽으로 비룡대는 해골 모습을 하고 있다. 10분 정도 올라가면 봉두봉(540m)에 닿는다. 산행에 지친 나그네들을 위해 여러 개의 벤치가 놓여 있어 제2쉼터 역할을 하는 이곳은 발아래 보이는 조그만 호수 탑영제와 그 주위에 만개한 벚꽃이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하다.
여기저기 배낭에서 나온 푸짐한 간식을 나누며 휴식을 취하고 탑사로 향한다. 사진을 찍느라 잠시 한 눈을 파는 사이에 오른쪽으로 보이는 뚜렷한 좋은 길을 놓치고 왼쪽 가파른 길로 내려 돌아가는 험한 길을 택한 일행의 뒤를 따른다.
삼거리에서 오른쪽 바로 옆 헬기장에 있는 묘는 탑사의 석탑을 쌓은 이갑용 처사의 묘소다. 잠시 후 주능선 길과 만나고 '탑사 0.3km' 라고 쓰인 이정표가 있는 사거리 안부에 닿는다.
암마이봉과 봉두봉 사이 안부에서 길은 탑사로 곧바로 내려가는 길과 암마이봉 뒤로 돌아서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이 나뉜다. 그러나 암마이봉은 식생보호지역으로 2014년까지 10년간 자연휴식년제로 등산로가 폐지되어 등산객들의 출입을 통제한다.
아쉬운 발걸음을 탑사로 향한다. 암마이봉을 암벽 등반하는 두 남녀가 아찔해 보인다. 탑사로 가는 길은 관광로다. 사실상 오늘 산행은 끝난 셈이다. 탑사에 도착하자 넘쳐나는 향락인파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암마이봉과 숫마이봉 사이에 자리 잡은 탑사에는 크고 작은 돌탑 80여기가 옹기종기 모여 장관을 이루고 있다. 마이산이 자연미의 극치라면 탑사와 돌탑군은 인간 상상력의 총아라고 할 만하다. 탑사는 지방기념물이고 돌탑군은 천연기념물이다.
세찬 바람에도 약간 흔들릴 뿐 무너지지 않고, 한겨울 탑 아래 정한수를 떠놓고 기도하면 사발에서 고드름이 하늘을 향해 거꾸로 자라나는 경이로움을 간직하고 있다.
이 석탑은 이갑룡(1860~1957) 처사가 25세 때 입산, 수도하며 산신의 계시를 받아 30여 년 동안 음양의 이치와 팔진도법을 이용해 쌓아 올렸다고 한다.
자연석을 그대로 사용하고, 위에는 전국 각지의 명산에서 한 두 개씩 주어온 돌을 얹어 국태민안(國泰民安)을 기원했다고 한다.
대웅전 뒤 맨 위에 있는 주탑인 천지탑(天地塔)은 부부탑으로 2기로 되어 있는데 높이는 13.5m에 이른다. 천지탑을 정점으로, 그 밑으로 동·서·남·북과 중앙을 의미하는 오방탑(五方塔)을 세웠다. 그리고 대웅전 아래에 돌 하나씩을 층층이 쌓아올린 중앙탑을 앉히고, 가장 앞 부분에 일광탑(日光塔)과 월광탑(月光塔)을 쌓았다. 조화의 극치를 이루며 줄줄이 세워져 있어 장엄하기까지 하다.
이갑용 처사는 1860년 3월 전북 임실에서 효령대군의 15대손 이성우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상을 치른 후에도 3년간 시묘를 했다. 그 후 나라가 어지럽고 인생의 허무함을 깨달아 명산을 찾아 수도하던 중 신의 계시로 30 여 권의 신서를 남기며 탑을 쌓은 다음 1957년 98세로 타계했다.
마이산은 줄사철나무의 북방 한계지이면서 군락을 이루고 있다. 천연기념물 380호로 지정된 줄사철나무는 삭막한 겨울에도 푸르름을 과시한다.
암마이봉과 숫마이봉은 가까이서 보면 군데군데 크고 작은 구멍들이 벌집같이 뚫려 있고, 산 덩어리 전체가 마치 시멘트 콘크리트를 버무려 놓은 것 같은 수성암으로 형성되어 있다.
마이산을 남쪽에서 보게 되면 봉우리 중턱 급경사면에 군데군데 마치 폭격을 맞았거나 무언가 파먹은 것처럼 움푹 움푹 파인 많은 작은 굴들을 볼 수 있은데 이것은 내부에서 표면으로 진행한 풍화작용에 의하여 형성된 타포니(Tafoni) 지형이라고 한다.
풍화작용은 보통 바위 표면에서 시작되나 마이산 타포니 지형은 풍화작용이 바위 내부에서 시작하여 내부가 팽창되면서 밖에 있는 바위 표면을 밀어냄으로써 만들어 진 것으로 세계에서 타포니 지형이 가장 발달한 곳이다.
아주 옛날 이 지역은 호수였는데, 그 증거로 바위에서 쏘가리 형태의 민물고기 화석과 고동, 조개화석 등이 발견되어 암질이 담수성 역암으로 판명됐고, 지각변동에 의해 바닥이 솟아올라 봉우리가 된 것이다.
암마이봉 깎아지른 절벽을 타고 기어오르는 능소화가 눈길을 잡아끈다. 지금은 덩굴만이 절벽에 뿌리를 내리고 붙어있는 능소화는 가지에 뿌리가 생겨 벽을 타고 올라가거나 다른 식물을 타고 성장하는 넝쿨식물이다. 탑사의 능소화는 1983년 주지 이혜명 스님이 심었는데 20여 년 세월이 지나서인지 굉장히 높이 올라가 있다.
◇능소화에 얽힌 전설
능소화에는 슬픈 전설이 전해온다. ‘아득한 옛날, 예쁜 궁녀가 왕의 눈에 띄어 후궁이 되었다. 다른 후궁들의 음모로 궁궐의 가장 깊은 곳에 기거하게 된 그녀는 왕이 찾아올 때만을 기다리며 담장 너머를 쳐다보고 살았다. 그러다가 그녀는 ‘담장가에 묻혀 왕을 기다리겠다’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해 여름 후궁이 머물던 처소의 담장에 핀 꽃은 조금이라도 더 멀리 담장 밖을 보려고 담장을 휘감고 올라 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있다.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평민이 능소화를 심으면 곤장을 맞았다고 한다. 꽃이 피면 시들지 않고 있다가 싱싱한 상태로 땅에 떨어져서야 비로소 시든다고 한다.
은수사로 향한다. 조선 건국의 역사적 산실인 은수사는 탑사에서 7분 거리에 있다. 조선 태조가 백일기도를 하던 중에 들렀던 사찰로 조선 건국의 계시를 받았다는 내용의 몽금척도가 보관돼 있다.
거대한 원추형의 돌기둥 숫마이봉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촬영하는 사진사의 호객소리가 사람들을 모은다. 누구는 코끼리를 닮았다고 하고 누구는 부처를 닮았다고 하여 상상의 나래를 자극한다.
사찰 앞에 거대한 북이 놓여 있는데 3번 두드리면 무병장수한다는 말이 전해온다. 무량광전 옆에는 태조가 먹다 뱉은 씨앗에서 싹을 틔웠다는 청실배나무(천연기념물 제386호)가 있다.높이가 18m에 이르는데, 몸통 줄기가 네 갈래로 갈라졌다가 이 가운데 두 줄기가 다시 합쳐지는 연리지 나무이다.
‘너만 산이냐, 나도 산이다’고 했다는 ‘나도산’과 암마이산으로 삼면을 휘 감긴 은수사 약수는 맛이 시원하다.
무량광전 뒤로 숫마이봉이 멋진 자태를 뽐내며 우뚝 솟아있어 한장의 그림엽서를 보는 듯하다.
은수사에서 금당사를 지나 주차장까지는 천천히 걸으면 30분 정도 걸린다. 전국에서 몰려든 인파로 붐빈다. 탑사를 지나 가로수 벚꽃 흐드러진 길을 따라 약 1km 를 걸으면 마이산계곡에서 흐르는 물이 고여 부부봉과 푸른 하늘 그림자가 거울처럼 비치는 탑영제가 나타난다.
왼쪽으로 1984년 세워진 담락당과 삼의당 부부의 시비가 있다. 담락당 하립과 삼의당 김씨는 남원땅 서봉방에서 태어나 1786년에 혼인한 부부 시인이다. 삼의당 김씨의 시문은 우리나라 규중 한시문학의 걸작으로 꼽힌다.
탑영제 호수 위를 지나는 오리보트와 그 뒤로 보이는 마이산이 아름다운 봄날의 풍경화를 그려낸다.
벚나무 터널을 거쳐 축제 한마당이 벌어지고 있는 금당사 경내로 들어간다. 은수사에서 1.5km 거리에 있는 금당사는 신라 헌덕왕 6년(814년) 혜감대사가 창건한 고찰이다. 경내에는 높이 9m, 폭 5m나 되는 괘불탱(보물 제1266호)과 중국인이 천년이 넘은 은행나무로 만들었다는 목조삼존불인 목불좌상(지방유형문화재 제18호) 등이 있다. 괘불탱은 가뭄이 심할 때 꺼내어 걸고 기우제를 지내면 비를 내리게 하는 신통력을 지녔다고 한다.
아무리 축제라지만 사찰 경내에서 노래자랑이 벌어지고 코 앞 길가에는 양쪽으로 즐비하게 음식점이 자리 잡고 있으며 진안의 명물 흑돼지 갈비 굽는 냄새가 진동한다.
밀려드는 차량으로 도로는 몸살을 앓고 있고 교통정리는 하는 경찰들은 진땀을 빼고 있다. 귀가는 용담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진안농협 앞에 영양돌솥밥 전문점 전주식당에서 늦은 점심식사를 한다. 6년 만에 얻은 귀한 아들이라 ‘홍삼’이란 별명을 가졌다는 아이와 나들이 나온 젊은 부부의 행복한 모습에서 사랑이 묻어난다.
수삼시장에 들렸다가 용담댐으로 향한다. 차안에서는 흉이 될 만한 이야기도 흉금 없이 나누며 웃음꽃을 피운다.
용담댐은 전라북도 진안군과 무주군 사이에 위치해 있는데, 금강 상류를 막아 건설한 다목적댐이다. 대전에 도착하니 여섯시가 넘었다.
시원한 냉면으로 저녁식사까지 마치고 다음 달 산행을 기약하여 아쉬운 작별을 나눈다. 몸은 피곤하지만 마음에는 행복이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하다.
'둔산 SDA산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25차]지리산 칠선계곡(07-06-17) (0) | 2008.09.09 |
---|---|
[24차]지리산 성제봉(07-05-13) (0) | 2008.09.09 |
[22차]칠보산(07-03-11) (0) | 2008.09.09 |
[21차]갈기산-월영산(07-02-11) (0) | 2008.09.09 |
[20차]대둔산(07-01-14) (0) | 2008.09.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