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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자료

김종직의 유두류록

 

 

◆  옛 지리산으로의 여행  : 김종직의 「유두류록(遊頭流錄)」



* 김종직(金宗直, 1431~1498)의 호는 점필재이고 본관은 선산이다. 그는 16세에 과거에 낙방하고 29 세에 급제한 뒤 성종 때에 형조판서까지 지냈다. 평소 문장과 경학에 뛰어났고 정여창, 김굉필, 김일손, 유호인, 남효온 등 15세기 후반의 대표적인 성리학자들을 제자로 길러냈다. 이들은 이른바 영남사림학파로서 훈구파와 대립, 수차에 걸친 사화에 연루되어 죽임을 당하기도 하였다. 김종직도 무오사화 때 그가 쓴 「조의제문」 파동으로 부관참시 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하였다.


  김종직은 그의 나이 42살, 경상도 함양군수로 있던 1472년에 그의 제자 조위, 유호인, 한인효 등과 함께 8월 14일부터 19일(음력)까지 5일 동안 지리산을 기행하였다. 그의 산행코스는 함양→ 중봉→ 천왕봉→ 세석고원→ 영신사→ 함양 마천이었다. 그는 지리산을 등반하면서 아름다운 자연을 마음껏 즐기고 그 속에서 호연지기를 기르는 등 대단한 만족감을 보였다. 



  이 글은 김종직이 지리산을 다녀온 뒤 저술한 「유두류록遊頭流錄」으로, 민족문화추진 위원회에서 펴낸 『명산답사기』(솔)에 실려 있는 번역문을 원문과 대조하여 수정. 보완하였다.



  나는 영남에서 성장하였다. 두류산은 바로 우리 고장 산이다. 그럼에도 이곳저곳으로 벼슬살이를 하면서 세상일에 골몰하다 보니, 나이는 벌써 40이건만 아직까지 한 번도 두류산을 구경할 기회가 없었다.


  그러던 중 1471년 봄에 함양 고을의 수령이 되었다. 그 경내에 있는 두류산은 새파랗게 우뚝 치솟아 고개만 쳐들면 바로 보였으나, 흉년이 들고 사무가 바빠 2년이 넘도록 한 번도 구경할 기회가 없었다. 유호인, 임정숙과 두류산 이야기를 하다 보면 가보고 싶은 생각이 늘 간절하였다.


  마침 금년 여름에 조위가 관동으로부터 와서 나와 함께 『예기』를 읽고 있었다. 그는 가을이 되자 장차 부모 곁으로 돌아가려고 하였는데, 떠나기 전에 지리산을 한번 구경 가자고 청하였다. 나 역시 허약한 증세가 날로 더해가고 다리 힘이 갈수록 떨어져 금년에 유람하지 못하면 내년을 기약하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때는 바야흐로 가을철이고 습한 기운도 이미 걷혔으니, 보름날 밤에 천왕봉에서 달을 구경하고, 닭이 울면 해가 뜨는 것을 구경하고, 밝은 아침에 또 사방을 두루 볼 수 있을 것이니 일거양득이 아닐 수 없었다.  드디어 길을 떠나기로 작정하였다.


  이에 극기를 불러 태허와 함께 『수친서』에 적혀 있는 것을 참고하여 산행 도구를 대충 준비하였다.


○1472 년 8 월 14 일


  덕봉사의 중 해공이 와서 길을 안내하는 역할을 맡고 한백원이 따라 나섰다. 드디어 엄천을 지나서 화암에서 쉬는데 중 법종이 뒤따라 왔다. 그에게 길을 물으니, 자못 자세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 역시 길을 안내하도록 하였다.


  지장사에 도착했다. 길이 가닥이 났으므로 말에서 내려 짚신을 신고 대나무 지팡이를 짚고 올라갔다. 골짜기와 숲이 맑고 깊숙하여 벌써 아름다운 경치를 짐작할 수 있었다. 1마장쯤 가니 환희대라는 바위가 있었다. 태허와 백원이 그 마루턱에 올랐다. 그 아래는 천길이나 되는데, 금대암, 홍연암, 백련암 등 여러 절이 굽어보였다.


  먼저 선열암을 찾았다. 암자는 가파른 절벽 아래에 지었다. 그 아래로 맑은 샘 두 개가 있었다. 담장 밖에는 바위 홈으로 물이 흐르는데, 물방울이 오목하게 파인 납작한 바위 위로 떨어져 괴어 있었다. 마치 깨끗한 못과 같았다. 그 틈에는 몇 마디쯤 되는 적양과 용수초가 듬성듬성 나 있었다. 곁에는 돌계단이 나 있고 등넝쿨 한 가닥이 나무에 매어져 있었는데, 그것을 붙잡고 묘정암과 지장암에 오르내렸다. 법종이 "한 비구승이 참선하면서 우란분盂蘭盆을 만든 뒤 구름처럼 노닐다 어디론가 사라졌다"고 하였다. 지금은 돌 위에 오이와 무가 심어져 있고 두어 되의 곡식을 찧을 만한 조그마한 절구통이 놓여 있을 뿐이다.


  다시 신열암을 찾았다. 중이 없는 빈 암자였다. 이 역시 치솟은 벼랑을 등지고 있었다.  동북쪽에는 독녀암獨女巖이라는 바위가 우뚝 솟아 있었다. 그 높이가 천여 자나 되고 다섯 가닥으로 갈라져 있었다. 옛날 어떤 부인이 이 바위 사이에다 돌을 포개어 집을 만들고 혼자 살면서 도를 닦은 뒤 공중으로 올라갔다는 전설이 있으며, 그 때문에 그런 바위이름이 붙었다는 것이다. 법종이 한 말이다.


  쌓아놓은 돌이 아직도 있었고 잣나무가 바위 중턱에 나 있었다. 그곳에 올라가려면 사다리를 놓고 잣나무를 붙잡고 바위를 돌고 돌아야 하는데, 등과 배가 모두 벗겨진 뒤에야 꼭대기에 이를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목숨을 내건 자가 아니면 올라갈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따라온 아전 옥곤이와 용산이는 벌써 올라가서 발을 구르며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내가 일찍이 산음지방[현 경남 산청군]을 오가면서 이 바위를 바라보았을 때, 여러 산봉우리와 함께 하늘을 받치고 있는 듯이 솟아 있었다. 지금 이곳에 와서 보니 몸이 오싹하고 황홀하여 내가 이 세상 사람인가 의심스러울 정도이다.


  조금 서쪽으로 돌아 고열암에 이르렀다. 해는 이미 저물었다. 그 서쪽에는 의논대議論臺가 있었다. 극기 일행은 뒤에 처졌다. 그래서 나 혼자 지팡이를 짚고 삼반석에 오르니 발아래에 향로봉과 미타봉이 내려다 보였다.


  법공의 말에 의하면, 절벽 아래에 석굴이 있다고 한다. 옛날 이 석굴에는 노숙과 우타가 살고 있었는데, 그들은 이미 해탈한 세 승려와 함께 이 돌에 앉아 불교의 진리를 논하다가 문득 도를 깨쳤다고 한다. 그래서 의논대라는 바위이름이 붙은 것이다.


  조금 뒤에 중 하납이 와서 합장하며 "듣자니 원님이 구경 왔다는데 어디 있는가"하였다.  법공은 그 중에게 눈짓을 하여 말하지 말라고 하였더니, 이를 눈치 챈 하납은 얼굴이 붉어졌다. 그래서 나는 장자의 말을 인용하여 위로하였다. "불을 쬐고자 하는 자는  부엌을 다투고, 쉬고자 하는 자는 자리를 다투는 법일세. 이제 그대가 한 늙은이를 만났으니 누가 원님인 줄을 어찌 알겠나" 하였더니 법공 등이 모두 웃었다.


 오늘은 첫날이라 시험 삼아 거의 20리 길을 걸었다. 몹시 피곤하여 깊은 잠에 빠졌다가 한밤중에 잠을 깼다. 밖을 내다보니, 달빛이 여러 봉우리를 삼켰다 뱉었다 하고 구름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바라보며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 1472 년 8 월 15 일


  새벽에는 더욱 음침하였다.  중이 말했다.

  "제가 이 산에서 오래 살면서 구름의 형상으로 점을 쳐 보곤 하였는데, 오늘은 반드시 비가 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 소리에 모두들 기뻐하였다.


  우리 일행은 짐꾼을 갈라서 돌려보낸 뒤 절에서 나와 즉시 떠났다. 푸른 등넝쿨과 깊은 대숲 속에는 저절로 말라 죽은 큰 나무가 시냇길에 넘어져 있어 다리가 되기도 하였다. 쓰러진 나무 중에는 절반이나 썩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가지가 땅을 막고 있어 말을 탄 것 같았다. 머리를 숙이고 그 아래로 나와 한 고개를 넘었다. 법공이 이르기를 "여기는 앞으로 넘어야 할 아홉 고개 중에서 첫 번째 고개입니다" 하였다.


  계속 걸어서 서너 고개를 넘으니 한 골짜기가 보였다. 골짜기 주위는 넓고 깊숙하며 수목이 햇볕을 가리고 다래덩굴이 이리저리 얽혀 있었다. 시냇물이 돌에 부딪쳐 구비치는 소리도 들렸다.


  골짜기 동쪽은 산등성이지만 그렇게 험준하지 않았다. 서쪽은 지세가 점점 낮아져 20리를 걸으면 의탄촌(현 하동군 마천면 의탄리)에 이른다. 만약 닭과 개. 소를 끌고 이곳에 들어와 나무를 쳐내고 밭을 개간한 뒤 서속. 기장. 삼. 콩 등을 심고 살면 저 무릉도원도 이보다 나을 것이 없을 것이다. 나는 막대로 시냇돌을 두들기다가 극기를 돌아보며 이르기를 "아, 언제나 그대와 더불어 숨어 이곳에서 놀아볼거나" 하고 바위에 낀 이끼를 긁어내게 하고 그 위에 이름을 썼다.


  아홉 고개를 다 지나서 산 능선을 따라 걸었다. 지나가는 구름이 나직이 삿갓을 스쳐가고 풀과 나무는 비가 오지 않았는데도 젖어 있었다. 비로소 하늘과의 거리가 멀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여기서 능선을 따라 남쪽으로 조금만 가면 바로 진주 땅인데, 안개가 자욱하여 멀리 바라볼 수 없었다.

  이윽고 판자로 지은 청이당에 도착하였다. 네 사람이 각각 당 앞에 있는 바위 위에 앉아 잠시 쉬었다.  여기서부터 영랑점令郞岾까지는 길이 극히 위험하였다. 이곳이 바로 『봉선의기』에서 "뒷사람은 앞 사람의 발밑만 보이고 앞 사람은 뒷사람의 이마만 보인다"고 한 곳이다. 나무뿌리를 휘어잡고서야 오르내릴 수가 있었다.


  정오가 지나서야 비로소 영랑점에 올랐다. 함양에서 바라보면 이 봉우리가 가장 높고 험준하였는데, 여기 와서 보니 다시 천왕봉이 올려다 보였다.


  이곳을 영랑점이라 부르는 것은 신라 화랑의 우두머리인 영랑이 삼천 명의 문도를 거느리고 산수를 유람하다가 이 봉우리에 올랐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옆에는 푸른 절벽이 만 길이나 되는 소년대少年臺가 우뚝 솟아 있었는데, 혹시 그 소년은 영랑의 문도가 아니었을까.  나는 바위 귀퉁이를 감싸 안고 그 밑을 내려다보니 꼭 떨어질 것만 같았다. 따라온 사람들에게 그 곁에 가까이 가지 말도록 하였다.


  때마침 구름과 안개가 걷히고 해가 아래로 비쳤다. 그러자 산의 동쪽과 서쪽의 광활한 계곡이 산뜻하게 바라다 보였다. 계곡에는 잡목은 없고 모두 삼나무, 회나무, 소나무뿐이었다.  그 중 3분의 1은 말라 죽어 줄기만 앙상하게 남아 있고 간간이 단풍이 들어 마치 한 폭의 그림과도 같았다. 산 능선에 있는 것은 바람과 안개에 시달려 가지가 모두 왼편으로 쓰러져 있고 앙상한 가지는 굽어진 채 머리칼처럼 나부꼈다.


  이곳은 잣나무가 매우 많은 곳이다. 그래서 이 고을 사람들은 매년 가을이면 잣을 따다가 공물로 바친다고 한다. 그러나 올해에는 한 그루도 열매를 맺은 나무가 없었다. 그럼에도 공물 액수를 모두 채우게 하면 우리 백성들은 어찌 될 것인가. 수령인 내가 직접 보았으니 참으로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서대초와 유사한 풀이 있었다. 부드럽고 미끄러워 깔고 앉았다 누었다 할 만하여 곳곳이 다 그러하였다. 청이당에 오기 전까지는 오미자가 울창한 숲을 이룰 정도로 매우 많았는데, 여기 오니 하나도 없었다. 다만 독활과 당귀만이 보일 뿐이었다.


  해유령蟹踰嶺을 넘었다. 길 곁에는 선암船巖이라는 바위가 있었다. 법종이 그 유래를 말해주었다. "아주 옛날 바닷물이 땅을 뒤덮었을 때 이 바위에다 배를 붙들어 매고, 게가 이 고개를 기어서 넘어갔기 때문에 그런 이름들이 붙여진 것입니다." 나는 웃으면서  "그대 말을 믿는다면 그때의 사람들은 모두 하늘을 더위잡고 살았을 것이 아니냐"하였다.


  드디어 우리 일행은 다함께 남쪽으로 중봉에 올랐다. 우뚝 솟아오른 산봉우리들은 모두 돌이었는데, 유독 이 봉우리만은 흙으로 덮여있었다. 판판하고 널찍하여 말을 달릴 수도 있었다. 그래서 조금 내려와 말을 쉬게 하였다. 바위에는 마실 수 있는 맑고 시원한 샘물이 있었다. 가뭄이 드는 해에는 사람들이 이 바위에 올라 발을 구르면서 돌면 반드시 천둥이 치고 비가 내린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지난해와 금년 여름에 사람을 보내어 시험해 보았더니, 소문대로 제법 효험이 있었다.


  오후에 천왕봉에 올랐다.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여 온 누리가 어둡고 중봉도 보이지 않았다. 해공과 법종이 먼저 성모묘聖母廟에 들어가 조그마한 부처에게 날씨가 개게 해달라고 빌었다. 나는 처음에는 장난치는 줄로만 알았다. 그랬더니 그들은 속설에 이렇게 하면 하늘이 갠다고 하였다. 그래서 나도 의관을 바르게 입고 세수하고 돌길을 더듬어 사당에 들어가 술과 과일을 차려놓고 성모에게 빌었다.


  "저는 일찍이 공자께서 태산에 올라 구경한 일과 한퇴지가 형산에서 노니 던 뜻을 사모하였으나, 직무에 매인 몸이라서 소원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다행히 금년 8월에 남쪽 경내의 수확을 살펴보다가 드높은 봉우리를 우러러보고 그곳에 가서 미력한 정성이나마 드리고자 하였습니다. 드디어 진사 한인효, 유호인, 조위 등과 함께 구름사다리를 밟고 이곳 사당에까지 왔습니다.


  하오나 비를 다스리는 귀신이 마술을 부려 구름이 김 서린 듯 깔려 있어 황당할 뿐 아니라 좋은 기회를 놓칠까 두렵습니다. 엎드려 비오니 성모께서 이 술을 흠향하시고 신통력을 발휘하여, 오늘 저녁 안으로 하늘이 맑게 개어 달빛이 대낮과 같고 내일 아침에는 만 리가 확 트여 산과 바다가 확연히 드러나게 해주소서. 그러면 우리들이 좋은 구경을 할 수 있게 될 것이니, 어찌 그 큰 은혜를 잊으오리까."


  이렇게 제사를 지낸 뒤 다함께 신위神位 앞에 앉아서 술 몇 잔씩을 나누어 마신 다음 일어섰다. 성모사당을 단지 3칸으로 엄천리에 사는 사람이 고쳐지었다. 못을 단단히 박은 판잣집인데, 그렇게 하지 않으면 바람에 날려가기 때문이다. 두 중이 벽에다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이른바 성모상은 돌로 만들었다. 얼굴은 예쁘고 머리는 쪽을 지었는데, 얼굴에는 분칠을 하였다. 이마에는 파손된 자국이 있었다. 그 이유를 중들에게 물으니, 1380년에 운봉 인월역에서 있었던 황산대첩 때 태조 이성계에게 쫓기던 왜구가 이 봉우리에 올라와 칼로 찍어놓은 것을 뒷날 다시 손질했다는 것이다. 동편에는 오목한 돌무더기에 해공 등이 빌었던 부처가 있었다. 이는 국사國師의 상으로, 민간에서는 성모의 음탕한 남편으로 보고 있다. 또 민간에서는 성모를 어떤 신으로 보고 있는지 중들에게 물어보니, 석가의 어머니 마야부인摩耶夫人이라 하였다.


  어찌 그럴 리가 있겠는가? 인도와 우리나라는 여러 나라로 가로막혀 있는데, 인도에 있는 가유국迦維國 부인이 어떻게 이 땅의 신이 될 수 있겠는가. 나는 일찍이 이승휴의 『제왕운기』를 읽어본 적이 있었다. 성모가 선사에게 명한 것에 대한 주석에는 "지금의 지리산 천왕은 바로 고려 태조의 비 위숙왕후이다"라고 되어 있었다. 이것은 고려 사람이 선도성모仙桃聖母의 이야기를 익히 들어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임금의 계통을 신성화하기 위하여 그런 이야기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승휴는 그것을 믿고 『제왕운기』에 적어 놓았다. 이 또한 증빙할 수 없거늘, 하물며 중들의 허무맹랑한 말을 어찌 믿을 수 있겠는가? 또한 성모를 마야부인이라 하면서 국사를 그의 음탕한 남편으로 만들어 더러운 욕을 먹이고 있으니 불경스럽기 짝이 없었다. 이에 그에 대한 해명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날이 어두워지자 음산한 바람이 이리저리 거세게 몰아쳤다. 성모사의 지붕이 날아가고 산악이 요동치는 것만 같았다. 또한 습한 안개가 몰려들어 모자와 옷이 모두 젖었다. 네 사람이 모두 사당 안에 자리를 깔고 누웠다. 찬 기운이 뼛속까지 스며들어 다시 두꺼운 솜옷을 껴입었다. 하인들이 모두 온몸을 떨며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어 큰 나무 서너 그루를 가져다 불을 피우고 쬐게 하였다.


  어느 덧 밤이 깊었다. 달빛이 어렴풋이 비쳤다. 반가워서 일어나 보니 다시 구름 속으로 숨어 버렸다. 흙벽에 기대어 사방을 바라보았다. 천지가 아득하였다. 마치 큰 바다 한가운데에서 조그마한 배 하나를 탄 채 이리 기울고 저리 기울고 하여 곧 파도에 빠지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웃으면서 세 사람에게 말하였다.


  "비록 한퇴지 같은 정성과 왕저 같은 도술이 없을지라도 다행히 그대들과 함께 우주의 근원을 타고 혼돈의 원시세계에 떠노니 어찌 위대하지 아니한가?"


◆  출처: 지리산에 가련다 / 김양식 지음 / 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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