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4. 3(금)

한라산둘레길은 한라산 중산간을 따라 조성된 총 9개 구간의 탐방로로, 전체 길이는 약 80km다.

그중 한라산 둘레길 5구간 수악길은 돈내코 탐방 안내소에서 출발해 산정화구를 지나, 5·16도로를 건너 수악 인근을 거쳐 이승악까지 이어지는 약 11.5km로, 한라산 남사면 숲의 깊이를 가장 차분하게 느낄 수 있는 길 가운데 하나다.


충혼묘지 근처 주차장에서 내려 걷기 시작한다.

차에서 내려 몇 걸음 옮기지 않았을 뿐인데 공기부터 달라지고, 길섶에는 활짝 핀 동백꽃이 아름다운 자태를 뽐낸다. 일상에서 한 발짝 멀어지는 듯한 기분이 든다.

시온동산(교회묘지)을 지나 약 1km 를 걸으면 돈내코탐방 안내소에 도착한다.



돈내코 탐방안내소에 도착하면 화장실은 꼭 다녀오는 것이 좋다. 한라산 둘레길 구간에는 화장실이 없고, 다음 화장실은 5·16도로 도착 직전에야 있기 때문이다. 짧아 보여도 숲길은 생각보다 길고 조용해, 출발 전에 미리 준비해 두는 것이 훨씬 마음 편하다.

숲길 초입부터 들려오는 새소리와 바람 소리, 그리고 멀리서 은은하게 들려오는 물소리가 오늘 걸음의 분위기를 미리 알려준다.

안내소를 지나 핑크색 한라산둘레길 리본을 따라 걷다 보면 갈림길이 나타난다. 왼쪽은 한라산 돈내코 탐방로, 오른쪽은 한라산 둘레길 수악길이다.


이정표를 확인하고 오른쪽 숲길로 접어들면, 금세 세상과 조금 떨어진 듯한 고요한 숲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숲길 여정이 시작된다.





한라산 둘레길 4구간 동백길과의 갈림길이다. 오른쪽이 수악길이다. 수악길의 첫인상은 단연 울창함과 적막함이다. 숲은 깊고 짙으며, 하늘은 나뭇가지 사이로만 드문드문 내려온다. 사람의 말소리보다 바람 소리와 새소리가 더 크게 들린다.

그 적막 속을 걷고 있으면, 제주의 바다 풍경과는 또 다른 한라산 숲의 얼굴을 만나는 듯하다. 신비로운 자연 앞에서는 저절로 걸음이 느려지고, 숲이 품고 있는 시간의 깊이에 경이로움마저 느껴진다.


수악길은 한라산 남사면의 숲과 오름 지형을 함께 느낄 수 있는 코스로, 걷는 내내 길의 표정이 조금씩 달라진다. 이 구간 주변에는 물오름(수악), 보리오름, 이승이오름 등이 분포해 있다.


그래서인지 길은 단순한 숲길을 넘어, 오름과 계곡, 화산지형이 겹겹이 이어지는 제주의 속살을 보여준다. 수악길이라는 이름도 이 일대의 지형과 물길에서 비롯된 듯 더욱 실감 있게 다가온다.

500m 마다 이정표가 설치되어 있다.








흙길과 숲길, 돌이 섞인 길과 나무뿌리가 드러난 오솔길이 번갈아 나타나는데, 발바닥으로 전해지는 감촉마저 이 길의 일부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수악길은 단순히 목적지를 향해 가는 길이 아니라, 걷는 시간 자체를 즐기게 만드는 길이라는 생각이 든다.



길을 따라 걷다 보면 한라산 남사면에서 흘러내리는 물길과 깊은 골짜기 지형이 자주 모습을 드러낸다. 도순천으로 이어지는 계류와 크고 작은 계곡들은 이 길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숲 사이로 스며드는 빛과 물의 반짝임이 길을 더욱 싱그럽게 만든다.


숲속을 걷다가 물길을 만나면 풍경은 한층 더 생기를 띤다. 계곡 주변의 공기는 유난히 촉촉하고 서늘해, 숲이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감각을 더욱 또렷하게 전해준다.




백록계곡에는 허리를 휘어 굽힌 고목이 유독 눈에 들어온다. 비틀리고 굽은 몸으로도 묵묵히 숲을 지키고 서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현무암 위에 뿌리내려 모진 바람과 세월을 견디며 살아왔을 거목도 태풍 앞에서는 끝내 쓰러졌다. 아무리 단단한 존재라도 자연과 시간 앞에서는 겸허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조용히 일깨워준다.





산정화구호는 화구 안에 습지를 품은 채 숲속 깊이 숨어 있는 화구호다. 주변 지형의 경사에 가려져 있다가 발견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마치 한라산이 오랫동안 감춰두었던 비밀 하나를 마주한 듯한 기분이 든다. 동수악오름과 같은 형태의 화산체로 추정된다고 하니, 이 길이 품은 자연의 깊이가 더욱 신비롭게 다가온다.







발밑의 흙과 낙엽, 나무 사이로 스며드는 빛, 그리고 사람보다 자연의 기척이 더 크게 느껴지는 시간들이 이 길의 매력을 만든다.




깊은 숲속을 걷는 동안 세상과 잠시 떨어져 있는 듯했는데, 어느 순간 멀리서 차 소리가 들려온다. 그리고 곧 수악길은 5·16도로와 만난다. 숲의 적막에서 현실의 소음으로 넘어오는 순간이다. 도로를 건너기 전에는 이 구간의 마지막 화장실이 있어, 잠시 쉬며 다음 길을 준비하기 좋다.

5.16도로(1131지방도로)를 건넌다.

이승악방면 수악길로 들어선다. 잠시 끊겼던 숲의 호흡이 다시 이어진다.

차들이 오가던 도로의 소란은 금세 멀어지고, 다시 나무와 바람, 흙길의 감촉이 걸음 곁으로 돌아온다. 마치 잠깐 현실로 나왔다가 다시 한라산의 품 안으로 들어가는 느낌이다.

직진하면 수악(물오름)으로 이어지고, 한라산둘레길은 왼쪽 숲으로 들이어진다.

길은 조금 더 차분하고 깊은 분위기로 이어진다. 화려한 풍경이 눈에 띄기보다, 오래된 숲이 주는 묵직한 안정감이 마음을 붙든다.


하늘을 향해 곧게 뻗은 나무들 사이로 햇살이 부드럽게 걸러지고, 그 빛이 길 위에 얼룩처럼 내려앉는다. 어떤 구간은 짙은 삼림의 기운이 공간을 가득 채우고, 또 어떤 구간은 나뭇잎 사이로 스며드는 바람이 숲을 흔들며 지나간다.





걷는 내내 한라산이 가까이 있다는 사실이 눈으로 보이지 않아도 몸으로 전해진다. 숲의 냄새와 공기의 온도, 흙의 촉감이 그 사실을 조용히 알려준다.




깊게 패인 골짜기 아래로 흐르는 물줄기와 이끼 낀 바위, 그리고 습기를 머금은 숲의 풍경은 제주의 또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제주라고 하면 흔히 바다와 돌담, 오름을 먼저 떠올리게 되지만, 수악길에서는 제주가 얼마나 깊고 울창한 숲을 품고 있는지 새삼 느끼게 된다.








이 길은 풍경을 '보는' 길이라기 보다는 자연을 '듣고 느끼는' 길이다.


걷다 보면 특별히 눈에 띄는 절경보다 오히려 작고 조용한 장면들이 오래 남는다.





이승이악 일대에는 일제강점기 말에 조성된 갱도진지의 흔적이 남아 있다. 숲의 고요 속에 묻힌 전쟁의 흔적은, 평화로운 풍경일수록 더 큰 대비로 다가온다.

숯가마 터 앞에 서니, 지금은 고요한 이 숲이 한때는 사람들의 생업과 땀으로 뜨겁게 살아 있던 공간이었음을 짐작하게 된다. 풍경은 사라져도 삶의 흔적은 오래 남는다는 사실을 새삼 느끼게 한다.





하늘 끝까지 닿을 듯 곧게 뻗은 삼나무 숲길은 짙은 숲의 기운이 한층 더 깊어지는 구간이다.




숲길을 빠져나오자, 한라산둘레길 6구간 시험림길 입구가 나타난다.




마침내 이승이오름 탐방 안내도 앞에 도착하며 한라산 둘레길 5코스 수악길의 여정을 마무리한다. 조용한 숲과 계곡, 시간의 흔적을 따라 걸어온 길이 마음속에 잔잔한 여운으로 남는다.

에필로그
수악길은 화려한 절경으로 압도하는 길은 아니다. 대신 숲의 고요와 물길의 숨결, 오름과 계곡이 품은 시간의 깊이로 오래 마음에 남는 길이다. 걷는 동안은 조용했지만, 다 걷고 난 뒤에는 더 많은 생각을 남겨주는 길. 수악길은 그런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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