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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화폐(지폐&주화)수집

대한민국시대(영국에서 제조된 원권지폐)

▣ 대한민국시대
 1. 영국에서 제조된 원권지폐

 정부에서는 국민의 건전한 경제질서를 확립하고 지하에 숨겨진 자금을 양성화하여 경제발전에 이용할 목적으로 제3차 화폐개혁을 1962년 6월 10일 전격 실시하였다.


이 시기의 화폐개혁에서는 화폐단위가 환에서 원으로 변경되었으며 단지 소액거래의 교환을 위해 50환권 및 10환권 주화만 유통을 허가하였다.


환가비율로 10환대 1원의 비율로 변경되었다. 종전의 환표시 지폐는 유통이 금지되고 지하자금으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도움이 되고자 화폐개혁을 단행했으나 목적달성에는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는 것이 후대의 평론이다.


화폐개혁을 극비리에 추진하기 위해 국제적으로 유명한 화폐전문제조회사인 영국의 토마스 데라루(Thomas De La Rue Co)사에 의뢰하여 비밀리에 도입되어 1962년 6월 10일부터 유통시켰다.


1원부터 50원까지는 평판인쇄로 발행되었지만 고액권인 100원과 500원은 요판으로 인쇄되어 있다. 그리고 500원권은 위조방지를 위해 은선(隱線)이 삽입된 특수용지를 사용하였고 100원권부터 1원권까지 하위지폐는 色絲를 삽입하여 위조에 대비하였다.


이중에서 총석정이 도안된 50원권은 바탕색이 붉은계통의 색상으로 도안소재도 인물이 아닌 자연경관인 총석정을 도안소재로 사용하였기 때문에 고액권 지폐보다 가격도 월등할 뿐만 아니라 수집인기가 상당히 높아 지금도 많은 애호가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2. 영국제조 지폐에서 국산지폐로 대체

한국은행에서는 과거에도 그랬듯이 제2차 화폐개혁 때 시도하였던 것과 동일하게 외국에서 제조된 지폐를 국내에서 제조된 지폐로 대체하는 사업에 착수하였다. 그 첫 작품으로 저액권지폐중 사용빈ㅇ도가 제일 많은 10원권에 첨성대를 도안소재로 채택하여 1962년 9월 2일 발행하였다. 특이한 점은 이 때부터 한국은행 인장이 한글로 바뀌어 명실상부하게 화폐에 사용되는 모든 글자는 한글로 변경되었다. 과거에도 모자상이나 세종대왕 1000환 및 500환권이 한글표시가 되었지만 인장만큼은 한자로 되어 있었다.


이어서 1962년 11월 1일 앞면에 독립문과 뒷면에 경회루를 도안으로 하고 크기는 영국에서 제조된 100원권과 동일한 지폐가 태어났다.


또한 소액물품거래 및 수소점이 발생되는 금전거래의 처리를 돕기 위해 10전과 50전 지폐가 1962년 12월 1일 발행되었지만 그다지 활용되지 못하고 1980년 발행이 중지 되었다.


이렇게 하므로서 영국애ㅔ서 태어난 6개 권종은 2종류 지폐를 국내산으로 대체하고 액면종류도 2종류가 증가하여 8개권종으로 세분화되어 국민의 경제활동 및 거래에 도움을 주는 계기가 되었다.


이 시기부터 국내의 지폐제조기술은 진일보하는 발판을 마련하는데 요판인쇄에 의해 순수 국산지폐를 생산하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화폐제조기술의 획기적인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또한 지폐에 삽입하는 도안의 소재도 다양해 졌다는데 커다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과거에는 환권체제의 지폐에서는 대부분 이승만대통령이 도안되거나 아니면 미국과 영국 등에서 제조된 지폐는 우리의 정서와는 약간 거리감이 있는 분위기 였다. 그러나 국내에서 제조되면서 우리나라의 역사와 자주성에 근본을 두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3. 요판인쇄기술의 지폐

한국은행은 우리나라 화폐사의 숙원이자 현대사회의 부응에 따라 그 동안 숙원사업이던 요판인쇄기를 도입하였다. 요판인쇄는 특수인쇄방식으로 서 이미 선진국에서는 수십년전부터 요판인쇄로 지폐를 제조하였던 기술로서 인쇄하고자 하는 선이나 글자부분의 음각부분에 잉크를 채워 넣고 인쇄압력을 가하는 방식으로 인쇄가 끝난 지폐부분이 돌출되어 손으로 만지면 질감이 느껴지는 독특한 인쇄기술이다.


첫 번째 작품으로 기존의 경회루가 도안된 100원권 지폐대신 세종대왕을 도안의 소재로 한 100원권을 1965년 8월 14일에 제조하고 뒷면에는 사적지로 지정된 지금의 한국은행 본관 전경을 평판으로 발행하였다. 이어서 1966년 8월 16일에는 요판인쇄기술을 진일보시켜 앞면과 뒷면을 요판으로 인쇄한 남대문 도안의 500원권을 발행하였다. 그리고 1969년 3월 21일에는 저액권 50원 지폐에 팔각정을 도안하여 발행하였는데 이 때는 고액권이 아닌 관계로 평판으로 인쇄하여 영국에서 제조된 50원권과 대체하기 시작했다.

 4. 고도성장기의 고액화폐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박정희 정권이 추진하던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 본궤도에 접어들어 점차 탄력을 받게 되자 자연히 경제규모가 커지면서 고액권 발행에 대한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한편 1970년 100원권 주화 발행으로 소액거래에 대한 화폐의 역할이 세종대왕 100원권 지폐에서 동전으로 대체되는 등 화폐의 개념이 점차 바뀌어 갔다. 한국은행에서는 이러한 사회 경제적 현실에 부응하여 10000원권 지폐를 발행하기 위해 신문에 공고까지 냈으나 10000원권 도안이 석굴암과 불국사를 도안해서 특정종교를 두둔한다는 이유로 종교단체의 저항에 부딪쳐 1963년 6월 12일 세종대왕을 소재로 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고액 10000원권이 탄생되었다.


또한 5000원권은 1972년 7월 1일 발행하였으나 도안의 소재인 율곡 이이의 초상에서 동양인이 아닌 서양인의 이목구비와 같다는 파문이 일어 이후부터는 표준영정을 정하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당시 5000원권이 서양인을 닮은 이유는 인쇄원판을 영국의 토마스 데라루사에 의뢰해서 크게 검증 없이 외국인의 의해서 제작되었기 때문이다. 1973년 9월 1일에는 종전의 남대문 500원권이 전체적인 색상이 흑색이어서 복사하기 용이하다는 우려 때문에 다양한 색상으로 교체된 이순신 500원권이 발행되었다.

 5. 국산용지와 표준영정을 채택한 지폐

한국은행에서는 그 동안 도안의 소재문제로 논란이 있었던 것을 계기로 도안에 대한 표준 영정을 정하기 위해 노력한다. 이러한 결과 1977년 6월 1일 새로운 5000원권이 탄생되고 1979년 6월 15일에는 새롭게 변경된 10000우너권이 발행되었다. 이 두종류 지폐에 사용된 인쇄용지는 종래까지 영국에서 사용되던 용지대신에 은화가 삽입된 구???산용지로 대체하여 국산용지의 고품질을 증명하였다. 국산용지는 내구성이 월등하고 인쇄방식에 적합하여 점차 국산용지로 대체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와는 별도로 도안에 사용되는 영정은 정부의 엄격한 심의를 거쳐 제조되었기 때문에 이후부터는 영정에 대한 시비는 상당히 줄어들게 되었다.

 6. 화폐체제를 정비한 지폐

한국은행은 금융통화위원회의 의결에 따라 1982년 1월 21일 대대적으로 화폐체제를 정비하였다. 종전까지 사용하던 지폐가 크기가 커서 휴대하기 불편하였으며, 국제적으로도 소형화 추세에 따라 이를 수용하기로 하였다.


변경된 특징은 도안은 지폐에 대한 국민의 공감대가 형성되도록 변경없이 인물도안을 그대로 채택하였다. 이외에 인쇄용지의 고품질로 지폐의 사용기간을 늘리고 시각장애인도 지폐의 권종을 쉽게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점자를 삽입하였다.


또한 자판기 및 은행의 ATM기 등에서 쉽게 감별하도록 전자감응요소를 넣는 등 지폐 체제 혁신에 주안점을 두었다.

 7. 위조방지강화와 저작권의 화폐

한국은행은 날로 정교해져 가고 첨단장비로 위조 및 변조지폐가 유통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이에 대한 방지책으로 다양한 방법을 강구한 지폐를 선보였다.


우선 1994년 1월 20일 10000원권을 발행하면서 은화부분을 복사할 경우 팔랑개비형태의 모습이 나오도록 강화하는 한편 부분 은선을 삽입하기도 하였다.


또한 화폐제조가 하나의 예술성을 가진 작품으로서 이에 대한 저작권을 표시하기 위해 2000년 6월 19일에 10000원권을 그리고 2002년 6월 12일에 5000원권을 발행하므로서 화폐의 도안에 대한 지적재산권을 강화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