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차, 천산신비대협곡
작은 소리에도 흔들리고 약한 바람에도 누워버리는
인간의 한계는 대자연 앞에 속절없이 그 실체를 내보이고 만다.
<쿠차는 기원전 1~2세기부터 ‘구자(龜玆)’란 이름으로 등장하여 한나라 이래 줄곧 ´구자’로 불리었다. 원나라 때 회골어 역음으로 ‘곡선(曲先)´이나 ´고선(苦先)’같은 이름이 생겼고, 청나라 건륭제 때 지금 지명으로 바뀌었다. <한서> ‘서역전´에 구자는 인구 8만 1천여 명에 군사 2만 여명을 보유한 서역 36개국 중 9대국의 하나였으며 일정한 국가체제도 갖추었고 쇠를 녹여 야금하는 법도 알았을 정도로 발달한 나라였다. 쿠차왕국은 동서 길이 1,000여 리, 남북이 600여 리에 달했고 8만 남짓한 인구에 사원이 100여 곳, 승려가 5,000명 이었다. 오아시스 육로의 지정학적 요지에 자리 잡은 까닭에 중국의 역대 왕조는 시종일관 이곳을 중시해 왔다. 흉노가 이 지대를 위협하자 중국은 기원전 60년, 쿠차 동쪽으로 350리 떨어진 오루성에 첫 서역도호부를 설치해 내침에 대비했다.>
쿠차의 아침은 조용하게 시작되었다. 깨어난 시간의 바깥 풍경은 아직 해가 뜨려면 한참 기다려야 하는 새벽이었기 때문에 평소의 습관대로 골목길을 산책하면서 하루를 시작하기는 힘들다.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간단한 요기를 한 후 호텔을 빠져나오는 시간도 아직은 이른 아침이다. 차창으로 바라보는 쿠차의 풍경 속에는 우루무치나 투르판에 비해서도 훨씬 위구르족이 많다는 것과 또 그만큼의 위구르어로 된 간판을 단 상점들이 즐비하다. 도심과 시골풍경이 어느 지점부터는 완연히 구분된다. 무엇으로 도심과 외곽을 구분하는지 잘 모르지만 나의 기준으로 보면 백양나무가로수나 숲이 나타나는 지점부터는 보통 시골길이 시작된다. 20여 미터가 훌쩍 넘는 가로수 길은 시장지역에서 하나의 아이콘이다. 척박한 자연환경에서 오아시스가 준 선물이다. 바람을 막아주고 그늘을 제공하여 사람이 살 수 있게 만들어 주어 나무와 사람이 공존하는 일체감을 보여주는 상징이다.
이런 지역에 형성된 마을들은 거의 순수한 위구르족 사람들만 모여 산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이런 위구르족 마을들의 입구마다 차단봉이 설치되어 있어 외부사람들이 출입을 할 때에는 위구르족의 허락을 얻어야 한다. 나중에 직접 경험한 일이지만 멋모르고 들어가려다 제지를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별로 기분이 나쁘지 않았던 이유는 그들의 표정에서 적대감대신 미소를 보았기 때문이다.
마을에는 흙벽돌을 쌓아 만든 담 안에 같은 재질로 낮고 평평한 지붕을 얹은 집들이 있다. 햇볕을 받아 하루 내내 달구어져도 낮에는 시원하고 사막지역 특유의 낮은 밤 기온에는 보온의 효과가 있다. 게다가 넘쳐나는 포도넝쿨을 마당으로부터 지붕으로 올려 그늘을 만드는 지혜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닐 것이다. 예상보다 훨씬 정갈한 위구르족 사람들의 생활모습은 어릴 때 내가 살던 동네의 아침을 떠올리게 한다. 어머니는 아침이면 마당뿐만 아니라 집 바깥을 쓸고 난 후 먼지가 날릴까 우물을 길어 마당 안 밖에 물을 뿌렸다. 이런 기억 속의 광경을 마을 곳곳에서 본다. 머리에 수건 을 쓴 아낙들이 분주한 발걸음으로 비질을 하거나 집 앞으로 흘러가는 물을 떠서 흙 길에 뿌린다. 흙먼지 풀풀 날리는 이곳의 아침기분을 흐르는 물처럼 상쾌하게 해주었다.
위구르족 마을을 거쳐 ´천산신비대협곡´으로 가는 길은 70여km에 불과하지만 도로공사로 3-4시간이 걸릴 것이란다. 천산신비대협곡이라는 이름 또한 과장된 중국식 표현이라 느껴지는데 아무리 공사를 해도 3-4시간이 걸린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 다만 편도 일차선 도로를 석탄을 실은 대형트럭의 무리들이 많이 오고가는 모습에서 뭔가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마을을 지나면 전형적인 고비사막이 한참 보이다가 출발한지 한 시간 여 지난 후 갑자기 붉은 황토빛 산이 나타난다. 기묘한 형태의 산은 이곳이 대협곡이구나 하는 느낌을 받기에 충분한데 아직은 협곡의 언저리에 왔을 뿐이라고 한다. 이곳부터는 길이 아닌 황토가 쌓인 흙 길로 차가 달린다. 우기에만 강이 되어 흐르는 계절하(季節河)인 쿠차강의 밑바닥이 길이 되어 있다. 그러다 보니 인근 광산에서 석탄을 실어 나르는 트럭들이 아무렇게나 질주를 하고 뒤를 따르는 차는 흠뻑 먼지를 쓸 수밖에 없다. 이런 길은 하루의 답사가 끝날 때까지 이어져 때로는 작은 시냇물이나 자갈밭까지 길이 되기도 하여 발걸음을 더디게 만들었다. 왜 70km가 네 시간이 걸리는지 슬슬 눈치 챌 수 있었다.
눈앞에 펼쳐진 산자락은 풍화작용과 함께 물에 쉽게 녹아 흘러내릴 수 있는 점토질과 이암(泥巖), 역암(礫巖)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단단한 골격을 이루는 부분들은 남아 있고 약한 부분들은 씻겨 내려가 거대한 성채(城砦)처럼 혹은 수없이 켜 놓은 촛불에서 촛농이 흘러내리는 모양, 배추 잎사귀를 한 겹 한 겹 펴놓은 듯 다양한 형태의 경관을 연출한다. 그 즈음부터 내 눈은 바빠지기 시작했다. 이곳 어딘가 쿠차의 랜드-마크(landmark), 상징적인 구조물로 남은 봉수대 하나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생각한대로 멀리 언덕 위에 그림으로만 보았던 봉수대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물이 말라 길이 된 하천바닥이 물로 가득 찬 어느 햇살 좋은 아침에 푸른 물이 흐르는 강가 언덕에 사진으로 남아 나를 설레게 하던 그 봉수대다. 물이 말라 갈라진 하천바닥을 앞에 두고 바라보는 봉수대는 아득한 전설하나를 안고 있다.
쿠차 왕국 시대 어느 왕에게는 예쁜 공주가 있었다. 어느 날 점성술사가 와서 왕에게 아뢴다. “앞으로 백일 안에 공주님께서 불의의 사고를 당해 목숨을 잃을 운명입니다.” 이에 왕은 공주가 궁궐 안에 있으면 죽음을 면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고 봉화대 안에 숨기기로 했다. “나와서는 안 된다. 백일 동안만 참으면 될 테니, 절대로 봉화대에서 한 발짝도 밖으로 나와서는 안 된다.” 왕의 당부가 있은지 99일이 흐른 후, 이제 하루만 더 넘기면 된다고 생각한 왕은 그제야 한 숨 돌리며, 공주가 무사히 이 위기를 넘길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백일이 되는 날, 왕은 마지막 식사와 과일을 공주에게 보냈다. 공주도 마지막 식사를 맛있게 먹었다. 식사를 마치고, 후식으로 사과를 덥석 베어 문 순간, 사과 속에 숨어있던 사막의 전갈이 공주의 입을 물어 공주는 그만 목숨을 잃고 말았다. 공주의 죽음을 접한 왕이 봉화대로 달려갔으나 이미 공주는 싸늘한 시신으로 변해 있었다. 공주의 시체를 끌어안고 통곡을 하다 미친 사람처럼 머리를 풀어헤친 채 봉화대 위로 올라간 왕은 쓸쓸히 사막 저쪽을 바라보다 몸을 아래로 던졌다.
쿠차강이 흐르는 지역을 따라 형성 된 기암지대인 대협곡은 위구르어로 케질리아(Kezliya)라 부르는데 유라시아 기판과 인도 기판이 충돌하는 과정에서 천산과 타클라마칸의 뒤틀림에 의해 형성된 자연적인 절경이다. 해발1,600m 최고봉 2,048m, 주협곡은 3.7km, 가지협곡은 2km의 붉은 산줄기 형태인 대협곡은 소금밭이 만들어낸 절경지역인 염수구경구(鹽水溝景區), 인근 키질리아 경승지인 홍산석림(紅山石林), 피라미드 관광구라 불리는 금자탑 자연관광구(金字塔 自然觀光區), 아단지모(雅丹地貌), 천산경구(天山景區)등으로 구분된다.
그러나 곳곳의 이정표마다 신비대협곡 입구라는 이정표가 붙어있어서 어디가 처음이고 어디가 끝인지 잘 구별할 수 없지만 광활한 협곡 지역이 어디든 제각각 다른 특색 있는 산세를 보여 준다. 물이 흐르는 쿠차강이 어디부턴가 나타나고 강 건너 멀리 산 아래로 녹색 짙은 밭과 유채로 보이는 노란 꽃이 아득하게 보인다. 마치 투르판의 교하고성 위에서 아득하게 낮은 강가로 백양나무가 줄지어선 마을을 보았던 기억이 났다. 마치 멀리서 교하고성을 보는 것처럼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닮은 모습이다. 이곳에도 군데군데 작은 오아시스가 있어 사람이 곳곳에 숨은 듯 살고 잇다는 증거다. 단지 기암괴석의 열병만 있다면 얼마 안지나 싫증이 났을 것이지만 물이 있고 꽃이 피고 나무가 자라는 모습이 어우러진 바탕이 있었기에 잠시도 숨 고를 틈 없이 안복(眼福), 심복(心福)을 누릴 수 있음이다.
네 시간 만에 도착한 대협곡의 비경이 담긴 장소에 이르러 늦지 않은 식사를 하고 걸어서 대협곡의 속살을 구경하기 위해 짧은 트레킹을 하였다. 길에서 보아도 예사롭지 않은 붉은 산은 몸체에 수 없는 주름으로 몸을 움츠렸으며 산등성이는 주름 수 만큼의 뾰족한 봉우리들이 날카롭게 하늘을 찌르고 있어 보는 이를 압도한다. 우리가 발을 딛고 협곡의 좁은 길로 걸어들어 가는 이곳도 사실은 우기에 물이 흐르는 물길이다. 지금도 발을 적실 정도의 물이 이곳저곳으로 흐르는데 바닥은 모래로 되어있어 물이 맑기 그지없다.
붉은 암석의 그늘과 햇볕이 드는 양지는 햇살에 의해 검은 색과 더 붉은 색으로 뚜렷이 대비를 이루어 딴 세상으로 나를 인도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더 깊은 곳으로 걸어 들어갈수록 주위에 사람하나 보이지 않고 내 발걸음 소리가 양편의 높은 절벽에 울려 다시 내 귀를 때린다. 갑자기 내 뒤로 아무도 따라 오는 사람이 없고 내 앞서 가는 사람이 하나도 없음을 알아차린 순간 덜컥 겁이 났다. 한 순간도 온전치 못한 이런 두려움의 근원은 어디에서 연유하는지 알지 못하나 자연처럼 늘 그대로인 일관성을 유지하지 못하고 살아왔기 때문 아닌지 생각해 본다. 작은 소리에도 흔들리고 약한 바람에도 누워버리는 가녀린 인간의 한계는 대자연 앞에 속절없이 그 실체를 내보이고 만다.
돌아 나오는 길, 산밑으로 흐르는 강물이 제법이다. 멀리 보이는 또 다른 오아시스와 산줄기는 아득한 동화속의 나라를 보는 것 같다. 산봉우리가 발밑 물가에 비추어 가까이 다가온다. 더듬어 그 봉우리를 만지니 물결에 산 그림자가 흔들린다. 햇살이 고이 비치는 저 아늑한 땅에는 누가 살고 있을까?
문득 몽골의 테를지나 터키의 카파도키아 비둘기 계곡의 하늘을 나는 열기구가 생각났다. 그곳과 비슷한 면도 아닌 면도 있지만 넓은 산등성이가 수km에 걸쳐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다는 공통점은 이곳의 하늘에 열기구를 타고 오르는 상상을 하게 만든다. 대협곡이 보여준 교훈은 자연에 대한 경외감이다. 이곳 천산중로와 남로의 답사가 끝나면 이내 강북(疆北)의 카나스호수로 갈 꿈을 꾼다. 천산산맥의 빙하가 녹아 흐르는 초원을 따라 펼쳐진 광대한 땅과 자연이 보여주는 경외감을 맛보고 싶은 까닭이다 | |||||||||||||||||||||||||
[배강열 칼럼니스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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