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한 권의 책과 같은 것, 여행을 하더라도 그 한 페이지 밖에 읽지 못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명언이다.
여행은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풍물과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이다. 많이 노력하고 준비할수록 알차고 기억에 남는 여행이 될 것이다.
2008년 2월 20일(수)
포카라-페와호수-카트만두-스와얌부너트-보드너트
7시 기상. 오랜만에 푹 잤다. 호텔에서 제공하는 아침식사를 마치고 현관에 나오자 멀리 히말라야의 웅장한 자태가 그 모습을 드러낸다. 아 이거였구나! 선명하지는 않지만 그 위용에 모두들 감탄한다.
이곳 택시는 대부분 우리나라의 티코만한 크기의 일제 Suzuki다. 혼자 택시를 타고 티베트 난민촌을 찾았다. 미터요금을 적용하지 않기 때문에 타기 전에 흥정해야만 바가지를 쓰지 않는다. (난민촌까지는 5분 거리 60루피)
타실링 티베티안 난민촌 Tibetan Refugee Camp
1959년 중국이 티벳을 무력으로 침공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조국을 떠나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의 상당수는 네팔로 들어와 카트만두, 포카라에 마을을 형성하여 살고 있다. 티베티안 난민촌에 가면 토산품 가게, 음식점, 학교, 호텔 등이 눈에 띈다.
티베트 사람들은 지금 중국에게 조국을 빼앗긴 채로 난민 신세인데, 달라이 라마가 망명해 있는 인도 다람살라와 네팔에 주로 많이 피신해 살고 있다. 그렇지만 그들은 히말라야 전역을 불교의 거대한 도량으로 조성했을 뿐만이 아니라 전 세계에 사원들을 건립하고 포교함으로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 아마 그 힘으로 조국의 독립을 성취하려고 하는 것 같다.
마침 사원에 모여 예불하는 모습을 한참동안 지켜보면서 카메라에 담는다.
스쿨버스를 기다리는 어린아이들의 모습이 많이 눈에 띤다. 남자의 1/3과 여자의 1/10 가량만이 글을 읽고 쓸 수 있다. 최근에 공립학교가 많이 세워져 교육 기회가 늘면서 문자 해득률이 점차 높아지고 있으며 5년간의 의무교육(1975 이후로 무료)과 고등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한다.
10시 숙소를 출발하여 페와 호수로 이동한다.
보팅을 하기 위해 호숫가로 내려서자 이상한 복장의 두 남자가 눈길을 끈다. 물어보니 돌아가신 아버지의 사모제를 지내고 있다고 한다. 입고 있는 옷은 상복이다.
페와 호수(Phewa Tal)
현지어로 페와탈(Fewa Tal)이라고 하며, 탈(Tal)은 네팔어로 '호수'를 뜻한다. 안나푸르나 트레킹에 지친 몸을 이끌고 포카라에 돌아오면 가장 편하게 여행자를 반겨주는 곳이다.
약 20만 년 전,이 일대가 바다에서 육지로 변할 때 남겨진 호수로 네팔 중서부 지방에서는 제일 큰 호수다. 포카라에 있는 대부분의 숙소, 음식점, 관광편의시설이 남북으로 긴 페와 호수의 호안을 따라 2km에 걸쳐 늘어서 있다.
이곳은 호수에 비친 '물고기 꼬리'를 뜻하는 유명한 마차푸차르(Machhapuchhare 6,998m)와 안나푸르나(Annapurna 8,091m)산을 사진 찍기에 가장 좋은 위치이기 때문이다. 특히 맑은 날은 호수에 투영되는 파란하늘과 더불어 눈 덮인 산이 그림처럼 다가온다.
페와 호수는 보트를 타며 느긋하게 즐길 수 있는 가장 좋은 장소이다. 배 위에 앉아 물속에 비쳐드는 히말라야 산을 바라보는 맛이 일품이다.
호수 안에는 작은 섬도 하나 있고 섬에는 시바를 모시고 있는 사원이 하나 있다. 이 바라히 사원(Barahi Mandir)에는 전설이 전해오는데 그것은 먼 옛날 시바신이 거지로 변장하여 이 마을을 찾은 적이 있었다. 여러 집을 돌아다니며 음식을 구걸하였으나 전부 거절당했는데, 농사를 지으며 가난하게 살던 한 노부부만이 그를 정성스럽게 맞이하며 음식을 대접하였다.
식사가 끝나자 시바신은 노인부부에게 “빨리 마을을 떠나라”고 말한 뒤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노부부는 서둘러 집을 떠나 산등성이로 올라갔다. 언덕을 오른 뒤 그들이 살던 마을쪽을 바라보니 마을은 물에 잠겨 흔적도 찾을 수 없고 커다란 호수만이 보였다. 이에 노부부는 그 거지가 시바신이었음을 깨닫고 호수 가운데 있는 섬에 그를 받드는 사원을 세웠다.
왼쪽 산꼭대기에는 묘법연화교라는 일본종교가 힌두교 나라에서 처음 자리를 잡은 산티투스파 사원이 눈길을 끈다. 이영애가 광고촬영한 곳이란다.
보팅을 마치고 서울뚝배기에서 점심식사를 한다. 서울뚝배기는 네팔 한국영사업무협력업체로 한국인 관광객들이 필수코스처럼 다녀가는 식당이다.
12시 정각. 점심 메뉴는 비빔밥과 짬뽕이다. 1시간 동안 점심 시사를 마치고 카트만두로 가는 국내선 비행기를 타기 위해 포카라 공항으로 이동한다.
작은 공항에 기아자동차 리오가 버티고 서 있고 공항 안에는 삼성 텔레비전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짐의 중량을 체크하고 여행 가방 하나하나를 열어 육안으로 위험물 소지 여부를 검사하지만 위협적이지 않아 모두들 편안한 기분으로 협조한다.
전수일 감독이 연출한 영화 “바람이 머무는 곳 히말라야” 촬영을 하고 귀국하는 배우 최민식씨 팀의 인솔자는 지난해 일본 북알프스 트레킹에서 만난 김이사(강가딘투어)다. 쫓기는 일정 때문에 짧은 안부 인사만 나누고 탑승을 하기 위해 공항대합실을 나선다. 보통 1시간 지연은 기본인데 15분 늦게 탑승을 시작한다. 모든 게 순조롭다.
우리 일행이 이용한 국내선 항공기는 YETI 항공 소속의 30인승 경비행기다. 지정된 좌석은 없으므로 왼쪽 자리에 앉아야 히말라야 연봉의 모습을 잘 감상할 수 있다.
왼쪽 창밖으로 펼쳐지는 히말라야 연봉들의 웅장한 모습이 한동안 시선을 고정시킨다. 파란 하늘위에 떠 있는 하얀 설산은 포근한 구름 모자를 쓰고 웅장한 자태를 뽐낸다.
포카라에서 카트만두까지 비행시간은 30분정도이지만 소음방지를 위해 제공되는 귀마개 솜을 비롯하여 사탕 그리고 쿠키와 커피가 기내서비스 된다.
3시. 카트만두 공항에 안착한다. 따로 수속 절차 없이 밖으로 나간다. 짐을 찾아 버스에 싣고 시내로 향한다.
봄날의 황사보다 더 지독한 먼지와 매연, 차선도 신호 등도 없는 길 위에 뒤엉킨 차량과 경적소리, 다닥다닥 붙은 길 옆 상가의 작디작은 상점과 그 너머로 어지러운 전깃줄, 땟국물 줄줄 흐르는 아이들이 시도 때도 없이 내미는 손 뒤의 깊은 눈길… 규격화된 일상의 흔적이 남아 있다면 그 모든 것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다시는 돌아갈 곳도, 부둥켜안을 소중한 것도 하나 없는 허허로운 방랑자의 가슴과 눈이 아니라면 그 생경한 일상에 온전히 동화될 수 없는 일이다.
적어도 카트만두에서는 그렇다.
카트만두 관광
1. 스와얌부나트 (SWAYAMBHUNATH)-성질 못된 원숭이가 살고 있는 원숭이 사원
카트만두 중심가에서 서쪽으로 2km를 가면 볼록한 언덕 위에 흰 스투파(탑)가 보인다. 이곳이 바로 높이 175m 네팔불교인 라마 불교의 성지로 유네스코에서 지정한 세계적 문화유산 스와얌부나트이다.
이곳은 카트만두의 유래와 관련이 깊다. 아주 오래 전, 카트만두가 호수였을 때 인도를 다녀오던 문수보살이 이곳의 사악한 기운을 끊기 위해 둘러싸인 산을 신성 검으로 잘라 호수의 물을 빼자 가장 먼저 수면으로 빛을 발했다는 전설도 있다. 그래서 이곳의 이름이 '스스로 창조된' 또는 '스스로 존재하는'이라는 뜻의 스와얌부(Swayambhu)이란다.
외국 여행자들에게는 멍키 템플로 통하듯이 이곳에 가면 원숭이들이 아주 많다. 원숭이 대장 하누만을 비롯하여 창조신 '브라흐마', 유지신 '비슈누(코브라)', 파괴신 '시바(링가)'의 조각들이 산재해 있다.
원뿔형 지붕을 이룬 황금 탑이 솟아오른 스투파(사리탑)는 카트만두 언덕에 있으며 모든 사원들 중에서도 고풍적이고, 불가사의한 탑이다. 카트만두를 수호하는 듯한 거대한 눈이 그려져 있다.
언덕으로 통하는 365개의 가파른 돌계단을 오르면 커다란 스투파와 만난다. 해체를 했었는데 보물은 없었고 사리만 나왔다고 한다.
땅은 명상, 흰색 돌은 번뇌로부터의 자유, 13계단은 해탈로 가는 13계단, 공기는 가벼워진 자유로운 영혼을 상징한다고 한다.
매일 아침 해뜨기 전에 수백 명의 순례자들이 일렬로 금박을 한 바즈라(Vajra, 티베트 어로 Dorje)를 지나 입구를 지키는 2개의 사자상을 지나서 시계방향으로 사리탑을 돌기 시작한다고 한다.
불교경전(옴 마니 반메 훔)이 적혀 있는 둥근 원통형의 불구는 “마니차”라 부른다. 옴 마니 반메 훔을 암송하면서 시계방향으로 돌리면 한번 돌릴 때마다 경전을 한번 읽은 것과 같다고 한다.
이곳은 기념품을 파는 상인들이 많이 �아 다닌다. 정가는 없다. 마음에 드는 물건이 있으면 부르는 금액의 1-20%에 흥정해서 적당하다고 생각되는 가격에 구입하면 된다.
2. 보우드넛 (BODHNATH)
티베트(TIBET)촌에 위치한 흰색의 웅장한 탑을 가리켜 보우드넛 (BODHNATH)이라 하며 스투파가 위치한 동네의 이름을 따서 보우다(Bouda)로 불리기도 한다.
카트만두 중심가에서 동쪽으로 5km 떨어진 곳에 있으며 탑의 기단 길이가 100m 스투파(사리탑)의 높이가 38m로 세계 최대의 불탑으로 티베트 불교도들의 성전이다. 이곳은 고대 카트만두와 라싸 사이의 고대 무역로로 사용되었던 곳이다. 티베트와 네와르 불교신자들에 의해 숭배를 받는 곳이며, 티베트인들은 이곳이 고대 부처의 사리가 묻혀있는 곳이라고 믿고 있다.
네와리족의 연대기에서는 이 사리탑이 마나데바 왕(King Manadeva)에 의해 15세기 후반에 건립되었으며, 이런 전설이 전해진다.
오랫동안 이 마을에 비가 오지 않아서 신에게 기도를 드렸다. 사람을 제물로 바치려는데 아무도 나서는 자가 없었다. 왕은 직접 자신을 바치기로 생각하고 아들에게 “누구든지 얼굴을 보지 말고 머리를 치라”고 했는데 머리를 자르고 보니 아버지였다.
그 아들은 너무 슬퍼서 이 탑을 쌓게 되었는데 물이 없어서 이슬로 짓게 되었다고 한다. 보우드넛은 “이슬의 탑”이라는 뜻이다.
땅(아랫쪽 4층 대좌), 물(반원형의 돔), 불(눈과 13층 첨탑), 바람(우산모양의 구조물), 하늘(꼭대기 첨탑) 등 탑의 단계별로 우주를 구성하는 다섯 가지 에너지를 상징한다고 한다. 아랫쪽 147개의 홈에 108개의 부처 모습을 볼 수 있다.
과거에는 네팔과 티베트의 교역로 상에 위치해 티베트를 찾는 상인들이 이곳을 찾아 무사귀환을 소원했던 곳이지만 현재는 스투파 주변으로 티베트인들이 몰려들면서 집단촌이 형성되어 있다. 오래된 티베트 골동품을 파는 가게도 많다. 사원이란 곳이 고즈넉한 분위기가 아닌 북새통을 이루는 시장 안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 신기하다.
스투파를 향해 오체투지를 하거나 마니차를 돌리며 스투파 주변을 순례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네팔이 아니라 티베트 같은 분위기가 느껴진다.
거대한 탑이라는 뜻으로 초르텐 쳄포(Chorten Chempo)라고 부른다. 부처의 마음과 신성함을 상징한다고 하는데 이 탑을 돌때는 반드시 시계방향(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돌아야 하고 <옴-우주><마니-지혜><반메-자비><훔-마음> 즉 옴 마니 반메 훔을 암송한다.
키애누 리브스 주연 영화 “리틀붓다”의 촬영지이기도 하다. 오후 6시에 문을 닫는데 가까스로 한 바퀴 돌 수 있었다.
차선도 신호등도 없는 거리는 가로등이 없어 어두컴컴하고, 기름을 구하기 위해 주유소 앞에 장사진을 친 차량과 넘쳐나는 인파로 매우 복잡하다.
서울뚝배기로 이동하여 달밧과 양고기볶음, 닭볶음을 곁들인 현지식으로 저녁식사를 하고 특별 초빙한 네팔 연주단의 노래에 맞춰 서로 함께 어우러져 춤을 추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우리 일행과 함께 춤을 춘 사람 중에는 네팔 경찰청장도 있었다고 한다.
네팔은 핸드메이드 파슈미나(PASHMINA-어린 양의 목털을 깎아 만든 제품) 숄과 석청(해발 3500m이상의 히말라야 절벽에서 채취한 꿀) 등이 유명하다고 한다. 가족과 친지들에게 줄 선물을 구입하여 숙소로 돌아온다.
여장을 풀고 호텔 바에 모여 네팔에서의 마지막 밤을 아쉬워하며 맥주 파티를 연다. 네팔 귀족의 결혼식이 열리고 있었는데 매우 호화롭고 이색적이다.
네팔 결혼식은 신부의 집에서 먼저 의례를 행한 후 짐을 싸서 신랑측 마을로 이동하여 신랑의 집에서 이틀 동안 파티를 여는 방식으로 행해진다고 한다.
신랑측에서 벌이는 파티 모습이다. 신랑과 신부가 함께 나란히 앉아 축하객을 맞이한다.
음식은 뷔페식으로 종류도 다양하고 매우 푸짐하다. 자정이 넘도록 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