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9. 7(일)
DMZ평화의 길 33코스(14km) : 건봉사-(5.4Km 버스이동)-송강쉼터-(7.4Km)-이승만 대통령 별장-(3.6Km)-대진항-(3.0Km)-통일안보공원
걷기 여행의 묘미는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시간과 기억이 겹쳐지며 과거와 현재가 하나가 되는 데 있는 것 같다. 이번 DMZ 평화의 길 33코스 여정도 그랬다.
건봉사입구에서 단체 기념사진만 찍고 곧바로 버스에 탑승한다. 건봉사 입구에서 군작전 통제 구간은 버스로 이동한다. 냉천리 유격장을 지나며 45년 전의 기억이 불쑥 되살아난다. 조교로 훈련생들과 함께 구르던 날들, 상병으로 진급해 716OP에서 포대경 너머로 군사분계선을 주시하던 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흘러간다. 그때의 긴장과 사명감이, 지금은 통일전망대로 바뀐 자리에서 평화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나 있다는 사실이 새삼 감격스럽다.




하늘은 잔뜩 구름을 머금었지만, 그늘 없는 농로를 걷기에는 오히려 더없이 좋은 날씨다. 들녘의 황금빛 물결이 가을의 풍요를 말해주고, 이미 추수를 끝낸 논도 보인다.



코리아 둘레길 송강 쉼터에서 본격적인 걷기가 시작된다. 화장실, 샤워실, 생수와 커피까지 갖춘 송강쉼터는 여행자들을 위한 작은 오아시스 같은 공간이다. 냉장고에서 생수 한 병을 챙겨 배낭에 넣는다.




자산천을 따라 걷다 송정교를 건너니 송정리 마을이 모습을 드러낸다.


길가를 따라 걷다 보면 계절이 말을 걸어온다. 바람은 부드럽고, 나무마다 과실은 탐스럽게 익어가고 있다. 초록 잎 사이로 노랗게 익어가는 여주가 빛나고, 한입 베어 물면 아삭할 것만 같은 햇사과가 붉게 얼굴을 내민다. 주렁주렁 매달린 대추는 햇살을 머금어 더 깊은 색을 띠고, 석류는 붉은 보석처럼 자신을 뽐낸다. 가을은 조용히, 그러나 풍요롭게 길가에 스며들고 있다.








동해대로의 굴다리를 지나자 화진포 둘레길이다. '화진포(花津浦)'라는 이름은 이 일대에 피던 해당화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꽃으로 가득한 나루, 그 시적인 이름만큼이나 이곳의 풍경은 눈부시다. 원당리 쉼터에서 소박한 점심을 펼치고, 이내 발걸음을 옮기자 화진포 호의 은빛 물결이 시야를 채운다.


죽정습지 전망대에 올라 바라본 탁 트인 풍경이 시원하다.








수크령이 하늘거리는 습지를 지나 금강송이 반기는 언덕을 넘어간다.




타고 오른 담쟁이 식물에 눌려 시름시름 죽어가는 금강송(적송)들이 안쓰럽다. 생명의 강인함과 덧없음이 동시에 묻어나는 현장이다. 흰색 물봉선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고개를 넘어 길을 따라 걷다 보면 근현대사의 흔적들과 만난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별장, 김일성의 별장, 그리고 이기붕 부통령의 별장까지, 한 호수 근처에 공존하는 세 채의 별장은 분단과 대립, 권력의 그림자를 동시에 말해준다.


입장권은 이승만대통령 별장, 김일성 별장, 이기붕부통령 별장까지 통합권으로 성인 요금은 3000원이고, 65세 이상은 무료다.


















화진포 호숫가에 '화진포 셔우드 홀 문화공간'은 의료선교사 셔우드 홀 가족의 헌신적인 삶을 되새기며 기억하는 전시 공간이다.






4층 루프탑 전망대에 오르자, 화진포 호수와 해변의 풍광이 한눈에 들어온다.




김일성 별장은 화진포 호숫가 언덕 위에 자리한 서양식 석조 건물이다. 원래는 1930년대 영국인 선교사 셔우드 홀이 독일 건축가 베버와 함께 지은 '화진포의 성'이었는데, 해방 이후 북한 정권 수립 과정에서 김일성과 그의 가족이 이용하면서 '김일성 별장'으로 불리게 되었다.
건물은 성곽 형태를 띤 2층 구조로, 내부에는 응접실과 식당, 침실 등이 있으며, 옥상에서는 화진포 호수와 동해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드디어 눈앞에 펼쳐진 동해. DMZ 평화의 길에서 마주한 바다는 그 자체로 벅찬 해방감이다.






초도리 앞 500m 해상에는 금구도(金龜島)는 신라시대 수군의 기지로 사용하던 곳으로 섬의 북쪽에 석축 일부가 남아있다. 최근 이곳이 광개토대왕릉이라는 자료가 발견되어 학게에 비상한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거진항에서 시작한 해파랑길 49코스와 이어지고, 금구교와 화진포 해양박물관이 지나간다.




송림과 해당화가 어우러진 철새도래지 회진포는 둘레 16km의 동해안 최대 자연호수다.





금강산로를 따라 대진중학교와 대진고등학교를 지나 초도항으로 향하니, 초도해수욕장이 여행자들을 맞이한다. '초도(初島)'는 '첫 섬'이라는 뜻으로, 육지에서 바라볼 때 맨 처음 보이는 작은 섬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실제로 이 일대에는 작은 바위섬들이 흩어져 있어 예부터 뱃사람들이 항해할 때 길잡이로 삼았다고 전해진다.






'대진(大津)'은 큰 포구라는 뜻이다. 예로부터 어선들이 드나드는 동해안의 중요한 나루터이자 군사적 요충지였으며, 조선시대에는 대진진(大津鎭)이라는 군사 진영이 설치되어 북방 방어를 담당했다. 지금도 동해안 최북단 어항으로 활기가 넘친다.




해수욕장은 폐장이어서 한산하다. 무지개 경계석, 바다색을 닮은 보도블록이 이국적인 정취를 더해주고, 이어서 만난 대진항은 동해안 최북단의 어시장이다.

조금 더 오르니 동해안 최북단의 등대인 대진등대가 굳건히 서 있다. 바람에 일렁이는 파도와 함께, 이곳에서의 시선은 더 멀리, 더 북쪽으로 향하게 된다.

대진등대에서 내려오면 대진 1리 해수욕장, 그리고 금강산콘도가 보이는 마차진 해변이 이어진다.







지금은 금강산콘도 앞 해변인 '마차진(馬叉津)'은 여러 설이 있다. 옛날 말을 몰고 다니던 장사꾼들이 이 나루에서 갈라져(叉) 길을 나누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라는 설과, '마차(馬車)'가 오가던 길목에 자리한 나루라는 설, 또 다른 설로는 고려·조선 시절 말을 수송하는 군사적 기지였다는 전승도 있다. 마차진은 예부터 교통과 군사, 물자의 집산지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금강산로를 따라 마지막 구간인 통일 안보 공원으로 발길을 옮기자, 통일전망대 출입국 신고소가 저 멀리 시야에 들어온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지금 걷고 있는 이 길은 45년 전 병장 계급을 달고 화진포해변 모래 채취 사역으로 자주 지나다니던 비포장길이다. 드디어 통일 안보 공원 주차장 입구, 34코스 QR코드 이정목에서 오늘의 여정을 마무리한다.


강원도 고성군 현내면 마차진리에 세워진 호림유격전적비는 6·25전쟁 당시 이 일대에서 전개된 유격 작전의 전승을 기념하고, 참전한 장병들의 희생과 공적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것이다.






명파마을은 강원도 고성군 현내면 명파리에 자리한 작은 어촌 마을로, 동해 바다와 인접해 있으며 명파해변과 함께 잘 알려져 있다.
명파마을은 군사분계선과 가까운 최북단 민간인 거주지라서, 예전에는 주민들에게 거주 이전의 자유가 제한되었다. 명파마을은 단순한 어촌이 아니라, 분단 현실을 온몸으로 겪어야 했던 마을이다.
6·25전쟁 이후 이 지역은 민간인 통제구역(민통선) 안에 포함되었고, 주민들은 군의 통제 속에서 생활해야 했다. 외지인의 출입은 제한되었고, 주민들도 출입증을 발급받아야만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농사나 어업에 종사하면서도 늘 군의 감시와 검문 속에 살아야 했고, 거주지를 마음대로 옮기는 것도 쉽지 않았다.
1980~90년대 이후 점차 규제가 완화되었지만, 여전히 이 일대는 DMZ와 맞닿아 있는 특수 지역으로 관리되고 있다.

돌아보니 이번 길은 단순한 트레킹이 아니었다. 군 복무의 기억과, 이 땅의 아픈 역사와, 풍요로운 자연과, 미래의 평화를 동시에 걸어온 여정이었다.
"걷다 보면, 그 길은 곧 나의 이야기다."
DMZ 평화의 길 33코스는 분단과 대립의 상징에서 평화와 생명의 길로 변해가는 우리 민족의 이야기를 발걸음으로 새기게 해 준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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